가족을 불안의 늪에 빠뜨린 욕망과 죄… 그리스 비극의 현대적 각색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숏폼의 시대라고 하지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드라마 8부작을 몰아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들을 유혹한다. 연극의 기원이 되었던 고대 그리스 시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는 세 명의 작가가 3편의 비극과 한 편의 희극을 올려 경연을 벌였다. 3편의 비극을 연속된 이야기로 꾸미기도 했다. 그리스 희곡 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연속된 비극 작품이다.
오레스테이아(오레스테스 이야기라는 뜻) 3부작은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과 그의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다. 신탁에 따라 사랑스러운 딸 이피지니아를 죽인 아가멤논은 전쟁에서는 승리하지만, 딸을 잃고 복수를 다짐한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에게 살해당한다. 이것이 오레스테이아의 1부 '아가멤논'의 이야기다. 2부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은 아버지를 잃은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에게 복수하는 이야기이고, 3부 ‘자비로운 여신들’은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가 신의 판결을 통해 정당성을 인정받는 이야기이다. 이 장대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영국 극작가 지니 해리스가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이 바로 지난달 31일 개막한 5시간이 넘는 국립극단의 대작 ‘이 불안한 집’(연출 김정)이다.
‘이 불안한 집’ 역시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와 2부는 ‘오레스테이아’와 같은 소재를 현대적으로 각색하지만 3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3부는 시간적 배경을 현대로 옮겨 엘렉트라를 진료하는 정신과 의사 오드리의 이야기로 꾸민다. 오드리 역시 엘렉트라와 마찬가지로 부모를 살해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인물이다. 한때 이를 극복했지만 의사로서 엘렉트라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다시 트라우마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 비극은 신이 정한 운명을 거부하는 인간과 신의 위태로운 관계를 다루는 작품이 많다. 인간은 신의 뜻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신의 뜻을 이기지 못한다. 운명의 절대성을 부각한 듯 보이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현대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신의 뜻에 인간의 욕망과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신의 형벌을 받아 무의미한 일을 되풀이하는 '시지프스 신화'를 신의 의지에 대항한 인간의 주체적 행동으로 본 카뮈의 해석처럼 말이다.
‘이 불안한 집’은 이피지니아의 희생으로부터 시작한다. 이피지니아는 전장에 나가는 아버지를 걱정하는 순진무구하고 한없이 착한 딸이다. 티끌만큼의 죄도 없는 이피지니아는 신탁에 따라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사실은 아버지 아가멤논의 탐욕이 그를 죽인 것이다. 클리템네스트라는 딸을 죽인 아가멤논에게 복수의 칼을 간다. 그를 살해하기 앞서 신들의 길인 붉은 카펫을 걷도록 권유하며 그의 오만을 확인한다. 아가멤논은 딸을 죽인 죄책감에 빠진 아버지가 아니라 전쟁 영웅의 자만심에 빠져 카펫을 걷는다. 이를 확인한 클리템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그렇다면 클리템네스트라는 순수하게 딸에 대한 복수로 아가멤논을 살해한 것일까. 아가멤논의 운명을 따르는 길에 개인의 욕망이 반영됐듯 클리템네스트라의 살인 역시 그렇다. 딸의 복수도 중요했지만,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기스투스와의 외도, 최고의 왕의 자리에 대한 욕망이 남편의 살해 동기가 된다.
2부의 엘렉트라는 그리스 비극과 다르게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하는 소녀가 아니라 어머니를 걱정하고 가족의 비극을 회복하려는 인물로 등장한다. 어머니의 회복을 바라던 엘렉트라는 아버지의 묘를 남몰래 지키고 있던 오빠 오레스테스를 만나 어머니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된다. 엘렉트라 역시 어머니를 시험하고, 오빠의 죽음 소식에 슬퍼하기보단 자신의 안위를 챙기며 기뻐하는 어머니를 확인하고 살해한다.
1부에서 아가멤논이 저지른 죄로 인한 불안은 클리템네스트라가 복수를 감행함으로써 그에게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어머니를 죽인 엘렉트라로 전해진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운명의 고리는 신들이 예정해 놓은 듯하지만 모든 근원은 인간의 질투와 욕망이다. ‘이 불안한 집’은 이피지니아를 첫 희생물로 두고 욕망과 죄로 인한 트라우마로 평생 불안해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원죄의 시작이 그러했듯이 인간은 욕망하기 때문에 죄인이 된다. 3부의 현재 장면은 앞선 1, 2부와 분리된 듯하지만 욕망의 결과로 인한 트라우마를 구조화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중심 장면이다. 운명 앞에서 번민하는 인간의 복잡한 내적 갈등이 2대에 걸쳐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이 불안한 집’은 24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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