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 감자탕, 돼지 없이도 감자탕 맛이 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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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감자탕을 먹었다.
돼지 없이도 깊은 맛이 나는 감자탕을 끓이기로 한다.
이 간단한 레시피로 진짜 감자탕 맛이 나는 걸쭉한 라면을 먹을 수 있다.
감자탕의 맛은 깻잎과 들깻가루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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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감자탕을 먹었다. 외식 경험이 거의 없던 나는 먹으러 가는 순간에도 감자탕이라는 음식이 무엇인지 몰랐다. 포슬포슬한 감자가 빨간 양념을 머금고 부글부글 익어가는 전골 같은 요리를 상상하며 반 친구들과 함께 생애 첫 감자탕집에 입장했다. 정작 감자는 몇 개 없고 뼈다귀만 가득한 걸쭉한 탕이 나왔다. 이게 왜 감자탕일까? 감자를 잔뜩 소화하려고 준비운동 중이던 위장에 돼지의 살점이 어리둥절하게 채워졌다. 친구들은 능숙하게 뼈를 발라 먹으며 나에게 골수까지 쪽쪽 빨아 먹으라고 했다. 미끄러운 쇠젓가락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돼지 등뼈의 오목한 홈 사이마다 하얗고 물렁한 것이 끼어 있었다.
채식을 시작한 최근 몇 년간 감자탕이라는 음식을 아예 잊고 살았다. 모든 동물성 식품을 거부하는 채식주의자가 떠올리기엔 또 다른 이름인 ‘뼈다귀해장국’이란 단어가 너무 살벌했던 모양이다. 그 이름은 저녁 메뉴를 고민하던 애인과 통화 중에 번뜩 떠올랐다. 오랜만에 단골가게를 찾아간 사람처럼 물었다. “감자탕 좋아해?”
그 역시 잊고 있었던 메뉴라며 감자탕의 소환을 무척 반가워했다. 그러나 근처에 감자탕 가게가 없었다. 굶주리던 그에게는 불행이었으나 전화기 건너 구경 중이던 나에겐 다행이었다. 돼지에게도 다행이라고 표현하진 못하겠다. 한 끼 안 먹었다고 돼지가 살아나진 않으니까. 그럼에도 뼈다귀 한 그릇만큼 돼지를 구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애인이 감자탕을 먹지 못한 이날 밤을 기억해뒀다. 돼지 없이도 깊은 맛이 나는 감자탕을 끓이기로 한다. 물은 라면 두 개 끓일 때보다 조금 많이, 감자는 두 개를 잘라서 먼저 익힌다. 간장이나 비건 조미료로 간한다. 나 혼자 먹을 땐 주로 간장이나 소금을 쓰지만 누군가를 대접할 땐 대기업의 힘을 빌린다. 덕분에 친구들은 내가 요리 천재인 줄 안다.
감자가 익으면 채식라면 두 봉지를 뜯어서 면과 분말수프만 넣고 함께 끓인다. 건더기수프까지 넣으면 평범한 라면 같아지기 때문에 생략한다. 얼큰한 게 좋다면 고춧가루도 한두 숟갈 풀어준다. 면이 거의 익어서 불 끄기 직전, 잘게 썬 깻잎과 들깻가루를 산처럼 쌓아올린다. 감자 익히기가 귀찮다면 깻잎과 들깻가루만 넣어도 된다.
이 간단한 레시피로 진짜 감자탕 맛이 나는 걸쭉한 라면을 먹을 수 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메인이라 생각했던 재료 없이도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다니. 흙에서 자라는 감자도 아니고 몸에서 태어나는 돼지의 등뼈도 아니었다. 감자탕의 맛은 깻잎과 들깻가루에서 나온다.
참고로 감자뼈라 불리는 돼지뼈가 들어가서 이름이 감자탕이 됐다는 설은 잘못된 상식이다. 그런 이름의 뼈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자어 감저(甘猪)가 감자탕으로 변형됐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현재 널리 먹는 감자탕의 유래로 보기엔 근거가 희박하다.
국민을 혼란스럽게 한 죄로 감자탕에서 뼈다귀를 퇴출하는 것이 좋겠다. 핏물 빼는 작업이 없으니 만드는 사람도 편리하고, 맛에 큰 차이가 없어 먹는 사람도 만족할 것이다. 이제부터 감자만 넣고 끓인 감자탕이 진짜다.
글·그림 초식마녀 비건 유튜버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남을 살리는 밥상으로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4주마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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