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린천 오지에 새 길 놓이자… 새들만 누리던 비경이 열렸다[박경일기자의 여행]

박경일 기자 2023. 9. 7. 09: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숨어있던 신비의 협곡 인제 ‘비조불통 계곡’
‘새가 아니면 통할 수 없는 길’
쇠줄에 도르래 걸어 건너던곳
4개코스 45㎞ 탐방로 마련돼
맑은물·신비한 초록이끼 감탄
심호흡하면 온몸 초록 물들듯
‘3코스’ 미산동길 산책로로 딱
평지길에 주변 경관 다채로워
시멘트 농수로 따라 걷는 재미
깊은 산중에 만난 작은 도서관
자연·공간이 건넨 위로에 뭉클
마주 보고 있는 방태산과 맹현산을 비롯해 첩첩한 고산 준봉 사이로 내린천 물길이 사행하고 있다. 물길 오른쪽 온통 짙은 숲길을 따라 ‘둔가리약수길 3코스’가 이어진다. 하나의 길 위에 온갖 다채로운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매력적인 길이다.
둔가리약수길 4-1코스가 지나가는 비조불통(非鳥不通) 계곡. 깊은 협곡 안이 온통 초록 이끼로 가득하다. ‘새가 아니면 통할 수 없다’는 이름처럼 접근이 쉽지 않았던 곳인데, 약수길을 놓으면서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됐다.

인제=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다녀오고서도 그곳을 소개해야 할지 망설일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은 가슴 두근거리는 공간을 발견하고 온 뒤의 고민입니다. 밖으로 알려질 경우 지금껏 잘 지켜진 생태와 경관의 훼손이 뻔하다면, 아쉽지만 덮어 둘 수밖에요. 전부 다 덮어 두고 넘어간 때도 있고, 그곳 얘기만 쏙 빼고 짐짓 모른 척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곳을 찾아 소개하고, 그곳의 매력을 일러 주는 역할이지만,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으로 더 큰 역할을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망설이고 고민했던 곳의 얘기입니다. 이번 주에 꺼내 놓는 곳은, 오래 숨겨두었던 강원 인제의 내린천 오지에서 만난 ‘비조불통(非鳥不通) 계곡’입니다.

# ‘비조불통’을 덮어둔 이유

‘비조불통(非鳥不通).’ 글자 그대로 풀이하는 뜻이 이렇다. ‘새가 아니면 통할 수 없다.’ 강원 인제의 내린천 물길을 굽이굽이 따라가는 곳. 내린천 변의 오지 중 오지, 소개인동에 숨어있는 비밀스러운 협곡에 붙여진 이름이다. 새가 아니라면 닿을 수 없는 곳이라니 얼마나 험준했겠는가. 없는 길을 더듬고 더듬어서 그 계곡 위에 올라섰다. 그게 15년 전. 쪽동백 흰 꽃잎이 오솔길에 융단처럼 깔리던, 그해 5월의 일이다.

비조불통 계곡 일대는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계곡의 들머리는, 게다가 그 오지의 물 건너편에 있었다. 물 이쪽에서는 보이지도, 짐작조차 되지 않는 자리였다. 내린천을 건너는 변변한 다리도 없어서 쇠줄에 도르래를 걸어 매단 탈 것을 이용해서 물을 건너야 했다. 계곡 가는 길을 막는 가장 더 큰 장애물은 ‘집’이었다. 계곡으로 가는 내린천 변에는 눈 밝은 이가 지은 단정한 집이 있었다. 비조불통 계곡으로 가려면 그 집을 관통해야 했다. 다른 길은 없었다.

그 집에 걸어놓은 당호가 ‘개인산방(開人山房)’이었다. 젊어서 시국사건에 연루돼 옥살이했던 집 주인은, 서울대 상대를 수석 졸업하고 무역업으로 성공한 뒤 홀연히 사업을 접고 물러나 이 집을 짓고 은거했다. 그는 집으로 드는 계곡 입구에다 바위를 세워 ‘미산동천(美山洞天)’이라 이름을 새겼다. ‘미산(美山)’이란 내린천 상류 마을의 지명이었고, ‘동천(洞天)’이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이른다.

그는 미산동천과 개인산방을 다 가졌으되 제 것으로 독차지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불러들여 경관과 감동을 나누고 인연을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각 분야를 대표하는 이들을 초대해 개인산방에서 강연을 열었다. 신영복, 신경림, 승효상…. 내로라하는 지성들이 이 깊은 오지까지 찾아와서 늦도록 모닥불을 피우고 이야기를 나눴다. 비조불통 계곡을 찾은 건 그 무렵이었다. 새가 아니면 가지 못한다는 비조불통 계곡 얘기도 실은, 그 집 주인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비조불통 계곡 입구의 커다란 바위를 힘겹게 딛고 올라섰을 때의 기억이 선명하다. 계곡의 경관은 경이에 가까웠다. 신록이 녹음으로 변해가던 무렵이었는데, 깊은 협곡은 양치식물과 짙푸른 이끼로 가득했다. 아무도 닿지 않은 깊은 계곡. 계곡의 숲이 보여주는 건 형태와 색이 아니라 시간과 깊이였다. 비조불통 얘기는 꺼냈으되 자세히 쓰지 않았다. ‘길이 끊기는 것’으로 계곡 얘기를 마무리했다. 비조불통 계곡이 어지러워질까도 걱정스러웠지만, 계곡이 깊고 위험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접근이 쉽잖다는 것도 고려한 결정이었다.

# 비조불통에 다시 가는 이유

그렇게 덮어두었던 비조불통 계곡을 다시 간다. 비조불통 얘기를 다시 꺼내 든 건 접근 불가였던 거친 계곡에 걷기 길이 놓였기 때문이다. 북부지방산림청은 강원 인제와 홍천에 걷기 길 ‘둔가리 약수숲길’을 놓고 있다. 이 길은 방태산을 중심으로 오지의 대명사 격인 ‘홍천의 삼둔’(달둔, 살둔, 월둔)과 ‘인제의 사가리’(아침가리, 적가리, 명지가리, 연가리), 그리고 주변의 이름난 약수(방동약수, 개인약수, 삼봉약수, 갈천약수 등)를 잇는 탐방로다.

약수숲길은 지금까지 4개 코스(45㎞)가 완성됐다. 2010년부터 길을 다듬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길을 놓기 시작한 지 자그마치 13년째다. 지도에 금을 긋고 단번에 길을 놓곤 하는 지자체의 길 놓는 속도와는 사뭇 다르다. 이렇게 느린 건, 예산이 넉넉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숲을 잘 아는 산림청이 ‘길의 지속 가능한 관리’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자체를 비롯해 여러 기관에서 앞다퉈 걷기 길을 내고 있지만, 대개 길을 놓는 데만 관심이 있다. 길을 만든 이후의 관리는 뒷전이다. 기껏 길을 만들어놓고는 관리예산을 배정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관리가 소홀하면 길은, 금세 흐려지는 법. 그러다 사실상 사라져버린 길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에 비하면 약수숲길은 잘 관리되고 있다. 어느 코스를 들어서든 길은 푹신하고, 안내판은 단정하다.

비조불통 계곡은 ‘약수숲길 4-1코스’다. 4코스 ‘개인약수길’은 이름처럼 개인약수 가는 길이다. 미산약수교를 건너 개인약수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4코스이고, 개인약수에서 비조불통 계곡으로 내려서 소개인동교까지 내려오는 길이 4-1코스다. 개인약수로 가는 길이 4코스고, 개인약수에서 돌아오는 길이 4-1코스인 셈이다. 하지만 꼭 그걸 따를 이유는 없다. 갈 때나 올 때나 약수숲길 4-1코스, 그러니까 ‘비조불통’ 계곡으로 올라가고 내려오는 걸 추천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차가 다니는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가는 약수숲길 4코스가 ‘재미없어도 너무 재미없는’ 길이라 그렇다.

내린천 물길을 끼고 있는 소개인동의 별장 ‘클루시브’. 자연을 해치지 말자는 건축주의 주문에 맞춰 지은 별장이다.

# 전설의 계곡을 따라가는 길이 열리다

비조불통 계곡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던 개인산방은 10여 년 전에 사라졌다. 그 집을 은퇴한 중견기업의 창업주가 샀다. 우연한 기회에 개인산방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주변 자연에 반한 딸의 권유로, 구경삼아 보러 갔다가 그만 마음을 빼앗긴 것. 개인산방을 인수한 그는 집은 그대로 두고 야생화 정원을 공들여 가꾸다가, 평소 알고 지내던 신예건축가에게 새로운 별장 설계를 맡겼다. 주문은 단 하나.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결과 노출콘크리트의 각지고 긴 상자 모양의 낮고 독특한 세 개의 건축물이 들어섰다. 전시와 음악, 명상, 휴식을 키워드로 한 공간이다. 개인산방이란 이름을 버리고 새로 지은 집의 이름이 ‘클루시브(clusive)’다. 인클루시브(inclusive·포괄적인)와 익스클루시브(exclusive·예외적인), 두 단어를 아우르는 이름이란다. 별장이지만 한때 제한적으로 외부인들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특별한 감각의 숙소나 별장 등의 이용을 중계하는 업체에서 회원에게만 제한적으로 문을 열었는데, 최근에는 그마저도 중단했다. 이즈음 클루시브의 문은 굳게 잠겨있다.

비조불통으로 들어가기 위해 별장 뒤쪽에다 가파른 임도를 낸 뒤 집을 빙 돌아 내린천 변으로 내려서도록 길을 냈다. 별장이 막고 있던 길을 크게 우회해 길을 낸 것이다. 내린천을 끼고 이어지는 푹신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나무로 뚝딱뚝딱 지어낸 작은 정자 하나가 나오고, 이어 비조불통 계곡이 나타난다. 깊이 심호흡을 하고 계곡으로 들어선다. 깊고 청정한 계곡 안에는 차고 맑은 물이 한가득하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과 바닥이 훤하게 보이는 소(沼)의 연속이다. 물길 주변의 바위와 나무둥치는 온통 초록 이끼로 가득하다. 협곡에는 벼랑의 바위를 파고들어 가지를 뒤틀고 있는 소나무들이 근사하다. 깊은 그늘 속이라 계곡 물이 밀어내는 공기가 서늘하다. 계곡의 모든 것이 다 청량해서 심호흡하면 폐부까지 초록색으로 물들 것만 같다.

비조불통 계곡으로 내려가는 4-1코스는 아직 완성된 건 아니다. 다듬어야 할 목재 덱 구간이 좀 남았는데, 북부지방산림청은 “10월 중순쯤이면 완성될 듯하다”고 했다. 계곡 주변에는 단풍나무와 복자기나무가 제법 많다. 완공 무렵이면 비조불통 계곡을 따라 불붙는 단풍을 만날 수 있을 듯하다. 비조불통 계곡 단풍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게 얼마나 장관일 것인지는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다.

# 가장 높은 곳에서 솟는 물…개인약수

약수숲길 4코스와 4-1코스는 개인약수 탐방로 턱밑에서 만난다. 약수숲길은 그 이름처럼 목적지가 약수다. 약수 탐방로 앞에서 두 길이 하나로 만나서 탐방로를 오른다. 개인약수는 약수 최초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을 만큼 역사도 깊고, 물맛도 좋다. 그런데도 가보거나 물맛을 본 이는 드물다. 약수가 멀고 가파른 탐방로 끝에 있어서 그렇다. 개인약수는 우리나라 약수 중에서 가장 높은 해발 960m에 있다. 개인약수까지 가려면 탐방로를 따라 해발고도를 300m 이상 높여가며 가파른 구간 1.4㎞를 걸어야 한다. 편도 40분 남짓 걸리는 길이다.

이쯤에서 약수숲길 4코스의 거리와 소요시간을 정리해보자. 4-1코스 출발 지점인 소개인동교에서 출발, 비조불통 계곡을 지나 개인약수 탐방로 입구까지 거리는 3.6㎞ 남짓. 편도 1시간 30분쯤 걸린다. 탐방로를 걸어서 개인약수까지 올라간다면 여기다 편도 40분을 더해야 한다. 몸이 좀 무겁다 해도 개인약수까지는 꼭 다녀오자. 여기까지 간 김에 천연기념물 약수 맛은 봐야 하지 않겠나. 약수숲길 4-1코스를 왕복하고, 개인약수까지 다녀오려면 왕복 4시간 30분쯤은 예상해야 한다.

보통 다른 약수터 앞 식당에서는 손님 상에 떠놓은 약수를 내거나, 약수로 밥을 짓거나 백숙을 끓이거나 하는데, 개인약수 입구에는 그런 곳이 단 한 곳도 없다. 약수가 산속 먼 길 끝에 있다 보니, 매일 그걸 떠서 나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어서다. 그러니 약수 맛을 보겠다면 두 발로 탐방로를 디뎌 약수터까지 다녀와야 한다. 개인약수는 톡 쏘는 맛이 강한 탄산 약수다. 철분 성분도 많아 비릿한 쇳내가 물맛에 녹아있는데 탄산과 어우러지는 진한 쇳내가 묘하게 매력 있다.

북부지방산림청이 지금까지 놓은 약수숲길 4개 코스를 모두 더 하면 45㎞ 남짓. 하지만 길의 완공은 아직 멀었다. 산림청은 앞으로 약수숲길의 총연장 거리를 250㎞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놓은 길의 다섯 배가 넘는 거리다. 인제와 홍천의 내로라하는 약수는 물론이고, 오지 중의 오지로 꼽히는 삼둔사거리까지 다 이어붙인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생각 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 하나의 길에서 만나는 다양한 풍경

둔가리 약수숲길 중에서 가장 다채로운 코스는 단연 3코스 ‘미산동길’이다. 비조불통 계곡의 짧고 압축적인 계곡미가 4코스의 특징이라면, 3코스는 내린천 변의 다양한 경관을 끼고 있는 평탄한 길이다. 출발지점은 내린천 미기교. 여기서 시작해서 미산약수교까지 12㎞ 남짓 구간을 걷는다. 길이 평지인 데다 주변 경관 또한 좋다. 숨 한 번 차지 않으면서, 지루하지도 않은 길이다. 가을을 즐기며 느긋하게 걷기에 딱 좋다. 소요시간은 4시간 20분 남짓이다.

3코스 미산동길의 특징은, 전체 구간의 절반쯤이 농수로를 끼고 이어진다는 것. 벼가 익어가는 논둑길을 딛고 하남3리 후평동을 지나면 내린천 변의 숲 속 오솔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거기서부터 길은 시멘트 농수로를 끼고 이어진다. 농수로가 시멘트로 지은 구조물이라 거슬릴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내린천 맑은 물이 담겨 흐르는 농수로의 느낌이 독특하다. 이즈음 잦은 비 때문인지 농수로에는 물이 그득하다. 산자락을 타고 흘러드는 물이 자그마한 폭포가 돼서 농수로에 담기는 구간이 있는가 하면, 농수로 한쪽으로 물이 넘는 구간도 있다. ‘소리는 크지만 거리는 먼’ 내린천의 물소리, 그리고 ‘소리는 작지만 거리는 가까운’ 농수로의 물소리가 서로 화음처럼 섞여든다.

미산동길의 또 다른 매력은, 길의 분위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하다는 것이다. 촉촉한 숲속 오솔길이 있는가 하면, 울창한 숲길이 있고 천변의 모래와 자갈을 딛고 가는 구간도 있다. 우뚝 일어선 기암 사이로 걷는 길이 있는가 하면, 버드나무 가득 우거진 습지를 끼고 가는 길도 있다. 수로 옆으로 잘 다져진 길을 걷기도 하고, 농수로를 덮은 시멘트 덮개 위를 걷는 구간도 있다.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 길이 이처럼 다양할 수 있을까 잘 믿기지 않을 정도다. 3코스를 다 걷고 나니 저마다 다른 대여섯 개의 길을 걸은 것처럼 느껴졌다.

3코스 걷기길 내린천 건너편으로 번듯한 왕복 2차선의 아스팔트 도로가 지나간다. 굽이굽이 내린천을 끼고 이어져 명품 드라이브코스로 손꼽히는 446번 지방도로다. 3코스 걷기 길에 오르면 내린천 건너편으로 줄곧 도로와 마을이 보이는데, 길은커녕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적막강산 구간도 있다. 내린천 변이 가파른 협곡을 이뤄 도로가 끼어들지 못하는 곳이다. 이런 지점에서 도로는 물을 버리고 마을 뒤쪽으로 에둘러 돌아간다. 걷는 맛이 좋은 건 이런 구간이다. 내린천 이쪽도, 물 건너편 저쪽도 인적 하나 없는 고요한 공간을 가로지르는 길이니 왜 안 그럴까. 3코스에서 이런 구간을 세 번쯤 만나게 되는데, 이 길 위에서는 아껴 걷고 싶어서 걷는 속도가 저절로 줄어든다. 걷는 내내 내린천의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길. 한 번도 숨차지 않은 길. 마음보다 몸이 저절로 앞서가는 길. 가을에 그 길을 걷는다는 건 축복이다.

맹현산 중턱에 있는 도서관 ‘맹현산방’ 앞에 세운 손글씨 푯말.

# 깊은 산중의 작은 책방…맹현산방

지금은 사라진 ‘개인산방’과 비슷한 느낌의 공간이 내린천 주변에 있다. 이번에는 물가가 아닌 산중이다. 내린천을 앞에 놓고 방태산과 마주 보고 서 있는 맹현산 중턱 가파른 비포장도로 길 끝에는 작은 도서관 ‘맹현산방’이 있다.

목판에 손글씨로 쓴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산길에 올라붙으면 이내 시멘트포장도로가 끝나고, 비탈지고 좁은 비포장 길이 나타난다. 대체 이런 거칠고 급한 길 끝에 뭐가 있긴 있을까 의심스럽다가, 가도 가도 민가 하나 나오지 않는 길을 지나 ‘다 포기하고 돌아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할 때쯤에 맹현산방은 나타난다. 산 아래 팻말에는 작은도서관까지 거리가 1.6㎞라고 적어놓았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더 먼 1.8㎞다. 조금이라도 거리를 줄여서 적어야, 포기하고 돌아가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그렇게 적었다고 했다. 거리를 줄여 적은 팻말에서 ‘누구든 와 줬으면’ 하는 따스한 마음이 느껴진다. 산길 1.8㎞는 멀다. 게다가 길도 거칠다. 승용차로는 아예 접근 불가. 사륜구동 차량으로도 아슬아슬 쉽지 않다. 포장도로까지만 차를 타고 가서 한쪽에 세워두고 속 편하게 걸어서 올라가는 편이 좋겠다.

맹현산방은 산중의 별장 겸 작은 도서관이다. 잘 가꾼 잔디마당을 가운데 두고 별장 건물과 산중 도서관이 ‘ㄱ’자 모양으로 앉아있다. 정성껏 가꾼 정원 한쪽에는 자그마한 폭포도 있다. 주인이 출타 중이어서 인적이 없다. 쭈뼛거리며 건물을 돌아보다가 별채 건물의 작은 도서관 문에 적어놓은 손글씨를 보았다. ‘늘 문은 열려있음.’ 주인이 집을 비웠어도 산골 도서관을 찾아오는 손님을 기꺼이 환영한다는 의미다.

첩첩산중의 가파른 비포장길 끝에 있는 작은 도서관 맹현산방. 한쪽 벽은 자연이 가득 담기는 통창으로, 나머지 삼면의 벽은 모두 책으로 빼곡하게 채웠다. 도서관 문은 언제든 열려있다.

목조로 지은 산골 도서관 건물 한쪽 벽은 통창으로 마감했다. 창밖 풍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나머지 세 개의 벽면은 모두 책꽂이다. 인문학 장르의 책 5000여 권이 촘촘하게 꽂혀있다. 읽고 싶은 책을 한 권 골라 통창을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신선놀음도 이런 신선놀음이 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주인이 마실 차도 준비해 놓았고 과자도 있다.

이런 깊은 산중에 웬 도서관일까. 이렇게 높고 먼 곳까지 책을 읽으러 오는 이가 과연 있기는 한 걸까. 맹현산방은 24년 전 서울 생활이 지겨워진 부부가 정주할 곳을 찾다가 정착해 지은 집이다. 농사를 짓고 벌을 치는 시골살이를 하던 부부는,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누구나 들어와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을 만들기로 하고 별채를 지었다. 산중 도서관 건립에 뜻을 같이하는 독지가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첩첩산중의 작은 도서관 ‘맹현산방’은 이렇게 탄생했다.

테이블에 놓인 방명록에는 작은 책방을 다녀간 이들이 적어놓은 글로 빽빽하다. 책을 빌려 간다거나, 반납한다는 글도 있고, 근사한 산중 도서관을 만들어줘서 감사하다거나, 신선 같은 삶이 부럽다고 적은 글도 있다. 방문객이 적어놓은 글귀처럼 맹현산방은 도시 생활에서의 고단함을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다. 산이어도 좋고, 물이어도 좋다. 내린천 물길을 끼고 있는 자연이어도 좋고, 맹현산 첩첩산중의 작은 도서관이어도 좋다. 걸어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다. 종래에 여행으로 얻고자 하는 건 따스한 위로가 아

니던가. 언제 찾아가도 위로가 되는 자연과 공간이 내린천이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인제의 내륙 오지에 있다.

■ 최악의 패전을 기억하는 자리

내린천휴게소에서 상남면으로 이어지는 31번 국도는 오미재 터널을 지난다. 터널이 뚫리면서 차량이 뚝 끊긴 오미재(오마치) 고개에는 현리전투전적비가 있다. 현리전투는 6·25전쟁 당시 오미재 고개에서 벌어진 한국전쟁 중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된 전투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3군단 예하 3사단과 9사단 병력 2만2000여 명 중 4000명의 사상자와 행방불명자를 냈으며 무기 70%를 잃었고, 전선은 70㎞나 밀려났다. 고개 아래 하남리에는 당시 전사자를 화장했던 자리에 세운 현리전투위령비가 있다.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