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적 원고의 아름다움

서울문화사 2023. 9. 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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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페트로스키가 마지막 작품으로 또 한 번 증명했다.

물리적 힘

헨리 페트로스키, 서해문집

헨리 페트로스키의 책 중 처음 읽은 게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글을 읽으며 느낀 충격은 기억한다. 공학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쓸 수 있지? 난해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렇게 간결하게 전달할 수 있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례를, 적절한 시점에 집어넣어서 독자의 흥미를 끌고 원고의 풍미를 돋울 수 있지? 그런데 이 사람이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전공은 불량 분석이라고? 원고 생산이 직업인 입장에서 나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었다.

헨리 페트로스키는 미국의 엔지니어이자 <연필>이나 <공학을 생각하다> 등으로 유명한 논픽션 작가다. 영미권을 비롯한 선진국에는 공학, 화학, 생물학이나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중 지향적 논픽션과 에세이를 발표하는 전문 작가가 많다. 올리버 색스가 한 예다. 헨리 페트로스키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다. 개념을 설명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누군가 내게 모범적인 문장을 묻는다면 나는 헨리 페트로스키를 추천할 것이다.

헨리 페트로스키의 문장이 아름다운 이유는 개념만 남겼기 때문이다. 그의 원고에는 불필요한 말이 없다. 저자의 글솜씨를 뽐내는 화려한 문장이나 사전을 찾아야 뜻을 알 수 있는 어려운 단어가 없다. 간결한 만큼 사람들이 읽기도 쉽다. 쉬운 단어를 재료 삼아 간단한 문장 구조를 짜면서 심오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프로의 기술이다. 헨리 페트로스키의 문장을 읽다 보면 장식 하나 없이도 아름다운 교량이나 공항 건축 같은 게 생각난다. 독자의 이해라는 기능에 충실했을 뿐인데 아름다운 것이다.

읽기 쉬운 글을 쓰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일단 자신이 해당 분야를 확실히 숙지해야 한다. 그래야 어떤 분야든 남이 이해할 만큼 쉬운 말로 풀어 쓸 수 있다. 내가 개념을 잘 이해했다면, 그 개념을 쉽고 유려한 문장들로 구성해서 사람들이 보기 쉽게 만들 줄도 알아야 한다. 보통 전자가 되면 후자가 안 되고 후자가 되면 전자가 안 된다. 둘 다 가능하면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 있다. 헨리 페트로스키처럼. <물리적 힘>이 읽기 쉽다고 느꼈다면 거장의 실력을 느낀 것이다.

어떻게 하면 쉬운 말로 심오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좋은 사례를 많이 들면 된다. 헨리 페트로스키도 구체적인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물리적 힘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사례를 모아서 간단한 동사로 정리한다. 그 사례는 영국인 물리학자 패러데이의 강연이기도 하고 자기 집을 수리하러 온 사람들의 망치질 소리이기도 하다. 뭐가 됐든 세상의 소음이 페트로스키의 설명을 거치면 힘에 대해 이해하는 신호가 된다. 그의 간결한 설명 끝에 역학의 주요 개념이 ‘밀고, 당기고, 붙들고, 놓친다’는 단순한 개념어로 정리된다.

<물리적 힘>은 헨리 페트로스키의 마지막 책이다. 그는 <연필>처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공학을 이야기하다가 <물리적 힘>처럼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 인간 사회 곳곳을 역학과 공학으로 설명하는 데 이르렀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문명사회 곳곳을 깨닫게 된다. 모든 일에는 각자의 의도가 있다. 모든 것이 나름 역사의 결과물이다. 실패나 실수도 있지만 인간은 거기서 뭔가를 배워서 앞으로 나아간다. 페트로스키는 <물리적 힘>이 나오고 1년 뒤인 올해 6월 이 아름다운 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크렘린의 마법사

줄리아노 다 엠폴리, 책세상

소설인데 러시아와 주변국 정세 예측처럼 읽히는 책. 1990년대 초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가 어떻게 변했는지 몇몇 등장인물의 삶을 통해 설명한다. 푸틴이나 프리고진 등 현재 러시아의 주요 인물이 실명으로 등장해 현실감이 상당하다. 유럽 역사와 현재 상황을 날실과 씨실 삼아 오늘날의 세계상을 그려내는 솜씨 역시 대단하다. 옛날에는 이렇게 서사라는 형식을 빌려 저자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소설들이 좀 있었는데, 신작 소설에서 이런 고전적인 구성을 보는 건 오랜만이다.

스파이와 배신자

벤 매킨타이어, 열린책들

비밀은 언제나 신비롭고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로우니 스파이의 모험담은 언제나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그중에서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때문인지 러시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책이 많이 출판되고 있다. <스파이와 배신자> 역시 그런 트렌드의 연장선에 있다. 저자 벤 매킨타이어는 러시아 KGB와 영국 이중간첩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의 삶을 그렸다.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는 <크렘린의 마법사>의 주요 이벤트인 소련 해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대형 이중간첩이다.

Editor : 박찬용 | Photography : 박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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