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DNA[김우재의 플라이룸](43)
얼마 전 ‘왕의 DNA’라는 단어가 화제가 됐다. 교육부 공무원이 아이 담임선생님에게 쓴 편지에 등장한 이 단어로 인해 학부모의 교권침해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DNA’라는 단어는 한국사회에서 물리학의 ‘중력’이나 ‘관성’처럼 일상어가 된 생물학 용어다. 정치인들도 심심찮게 DNA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며칠 전 윤희숙 전 의원은 칼럼 제목을 ‘민주당의 대중 굴종 DNA’라고 지었고, 김진애 전 의원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태도를 두고 “(윤 대통령과) 같은 DNA”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정치인들에게 DNA라는 단어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나 성향을 의미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사회에서 DNA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어감으로 사용된다.
왕의 DNA
DNA라는 단어야 문제 될 이유가 없다. 더 큰 문제는 교육부의 꽤 고위직 공무원이라는 자가 의료면허도 없는 사이비 치료사에게 속아 알량한 지식으로 교육현장을 교란하려 했다는 데 있다. 몇 년 전 황당한 명상법으로 유사과학을 퍼뜨리던 단체에 고소당했을 때, 이 단체가 경기도를 비롯한 여러 지자체에서 교사들의 연수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기겁했던 적이 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교사연수라는 명목으로 형성된 시장에 엄청난 사이비 과학자들이 침투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도, 아니 아예 알아차리기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에서 과학은 사치다. 대통령도 그런 생각인 것 같다.
그 교육공무원은 왕의 DNA라는 단어로, 자기 자식이 다른 아이들과 유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한 것 같다. 왕의 DNA 연구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아마도 영국 왕실의 혈우병 가계유전일 듯한데, 이 연구의 결론은 왕의 DNA는 돌연변이투성이라는 것이다. 치사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난 경우는 인간에게 매우 흔한데, 이런 치사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이유는 근친교배가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까운 친족일수록 비슷한 위치에 치사돌연변이를 보유하고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혈우병이 문제가 된 건 영국왕조가 한창 근친교배로 왕가를 유지하던 무렵이었다. 왕의 DNA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걸 순수하게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유전학에서 유명한 법칙 중 하나가 바로 ‘잡종강세(heterosis)’ 현상이다. DNA는 섞이지 않으면 불량품으로 전락한다. 왕의 DNA 같은 건 없다.
여왕의 DNA
유전적으로 생식계급을 유지하는 진(眞)사회성 종은 드물고, 이들 생식계급에 인간은 ‘여왕’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래서 꿀벌의 생식계급은 여왕벌로, 노동계급은 일벌로 불린다. 안타깝게도 꿀벌에겐 왕이 없고, 수벌만 있다. 수벌의 역할은 훌륭한 정자를 여왕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결혼비행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면 수벌은 꿀벌군집에 불필요한 천덕꾸러기일 뿐이고, 특히 식량이 부족한 겨울에 수벌은 기생충에 가깝다. 따라서 일벌들은 수벌을 쫓아내 죽인다.
그러니 꿀벌군집에 인간사회의 왕 같은 존재가 있다면 그건 여왕뿐이다. 그런데 여왕벌과 일벌은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니까 여왕의 DNA 같은 건 없다. 여왕벌과 일벌은 같은 알에서 만들어진다. 만약 애벌레가 3일 이상 로열젤리, 즉 왕유를 섭취하게 되면 무조건 여왕이 된다. 왕유에는 여왕벌의 생식기관을 발달시키는 호르몬과 여러 영양소가 들어 있다. 왕유를 장기간 섭취한 애벌레의 DNA에는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생긴다. 후성유전학적 변화는 대부분 유전체의 특정 좌위에 일어나는 메틸화와 관련돼 있다. 바로 이 메틸화 차이로 인해 유전자 발현의 변화가 일어나고, 꽃가루와 꿀을 먹고 자랐으면 일벌이 됐을 일벌 애벌레는 여왕벌로 변화할 수 있다.
여왕벌과 일벌의 후성유전학적 차이는 두 계급의 서로 다른 신체적·행동적 특성을 담당한다. 여왕벌은 일벌보다 크고 수명이 더 길며 벌통에서 유일하게 알을 낳을 수 있게 된다. 일벌은 여왕벌과 유충을 돌보고, 꿀과 화분을 수집하며, 벌통을 수리하고 온도를 유지하는 등의 다양한 작업을 수행한다. 같은 DNA로부터 서로 다른 계급이 탄생한다. 다만 어린 애벌레 시절 무엇을 먹이로 섭취했는가가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꿀벌의 계급분화는 유전과 양육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어떻게 양육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계급과 DNA
잘못된 이름은 잘못된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은유는 인류의 경험에 제한적이다. 처음 꿀벌의 생식계급 개체를 발견했을 때,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있는 은유는 왕조와 관련된 단어뿐이었을 것이다. 수만 마리의 일벌이 일하고 있는 집단에서 홀로 군림하는 여왕, 그게 여왕벌이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여왕벌은 꿀벌집단의 유일한 노예다.
여왕벌이 꿀벌집단을 지배한다는 착각은 여왕벌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일벌들로부터 생겨난다. 하지만 꿀벌집단이 여왕벌을 사력을 다해 보호하려는 이유는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집단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꿀벌집단의 주인은 여왕이 아니라 일벌군집이다.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
첫째, 여왕의 생사를 결정하는 건 일벌집단이다. 여왕이 늙어 산란이 늦어지면, 일벌들은 회의를 시작해 새로운 여왕을 만들어내고, 늙은 여왕을 꺾는다. 둘째, 꿀벌집단의 필요충분조건은 여왕이 아니라 충분한 숫자의 일벌이다. 여왕이 불의의 사고로 사라져도 꿀벌집단은 멸종하지 않는다. 계절이 좋다면 일벌들은 새로운 여왕을 만들어낼 수 있다. 즉 여왕은 꿀벌집단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셋째, 꿀벌집단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은 모두 일벌들의 의회에서 결정된다. 집단이 너무 커져 분봉한다거나, 헌 집을 버리고 새 집으로 옮긴다거나 하는 결정은 모두 일벌들의 의회에서 결정된다. 이런 집단적 의사결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꿀벌집단은 인간사회처럼 중요한 결정을 대통령 단 한 사람이 결정하도록 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꿀벌의 계급이 인간의 계급보다 더 유전적이고 덜 환경적일 것이라 착각한다. 오히려 반대다. 꿀벌의 계급분화가 덜 유전적이고 더 환경적이다. 인간사회가 지난 수백 년간 만들어낸 계급분화야말로 친족선택이 작동하는 유전자가 지배하는 구조에 가깝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마치 DNA가 무슨 불변의 유전적 결정인자라도 되는 것처럼 사회적 불평등을 DNA라는 용어와 개념으로 정당화해왔다. 그러나 우리의 불평등은 대부분 사회적 환경에서 기인하는 비극이다. 왕의 DNA는 없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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