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악범 대부분은 왜 남자? "남성 병들게 하는 '가부장 코르셋' 탓" [인터뷰]

신은별 2023. 9. 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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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남성성 전문가 마르쿠스 터이너트
"'남성은 유능하고 강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
남성에 고통 주고 약자 향한 분노·폭력 키워"
스위스 출신 남성성 전문가 마르쿠스 터이너트(50)에 따르면, 사회가 남성에게 요구하는 특정한 종류의 남성성이 있고, 이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달성하지 못해서 남자들은 심리적 압박과 고통을 느낀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올해 7월 21일 서울 관악구 신림역 칼부림 살인, 8월 3일 경기 분당구 서현역 칼부림 살인, 8월 17일 신림동 강간 살인. 최근 잇따라 발생한 흉악 범죄들로, 가해자가 모두 20·30대 남성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무차별 살인을 예고했다 체포된 이들의 대다수도 남성이다.

가해자가 남성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모욕"이라는 반발에 부닥친다. 그러나 젠더 담론이 앞선 유럽에선 일찌감치 '왜 남성이 주로 흉악 범죄를 저지르나'를 고민했고, 특정한 남성성이 사회를 향한 분노를 촉발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이론적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가부장제하에서 굳어진 "남자는 강하고 우월해야 한다" 등의 사회적 요구가 남성들에게 압박으로 작용하는데, 그 요구와 다른 삶을 사는 남성들은 폭력성을 분출하는 식으로 박탈감과 분노를 해소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는 "남성이 그릇된 남성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전 세계적으로 '남성성 타파와 남성 해방 운동'이 확산하는 배경이다.

운동을 주도한 건 여성보다 남성이 많다. 대표적 인사가 스위스 출신 마르쿠스 터이너트(50)다. 스위스 남성단체 '매너'의 창립자이자 이사인 그는 스위스는 물론이고 독일 정부의 남성 정책 수립 과정에 참여할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

터이너트는 최근 한국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왜곡된 남성성 타파는 폭력 등 사회적 병폐 해결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이른바 '이상적 남성성'을 달성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남성이 받는 고통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이어 "여성이 여성성의 굴레에서 해방되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남성도 '남성성 코르셋'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마르쿠스 터이너트. 그는 스위스 남성단체 '매너'의 창립자 겸 이사로, 20여 년간 사회가 남성에게 요구하는 남성성을 따르는 것의 폐해와 이로 인한 남성의 심리적 억압 등을 연구해왔다. 본인 제공 ⓒAnnick Ramp

"자고로 남자란…"에서 시작되는 비극, 폭력성 키운다

20여 년간 남성의 심리와 남성성을 연구해온 그는 "국가, 문화권마다 일부 차이는 있지만, 남성의 태도, 행동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기대치는 예로부터 분명하게 존재해왔다"고 말했다. 여성을 배제한 가부장제는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므로 사회적 자산을 독점하되 가족 부양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 맥락에서 "남성은 힘이 세야 한다", "남성은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같은 압박이 가해졌다.

가부장제가 허물어지면서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자산을 차지하기는 힘들어졌지만, '강하고 유능한 남자'로 대변되는 남성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격차에서 비극이 시작됐다. 터이너트는 "'남자다운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충분히 성취하지 못한 사람이나 사회적 요구에 맞춰 살았는데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좌절감을 느끼고 사회에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불만은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발현될 위험이 있다. 터이너트는 "약자인 타인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 무너뜨리는 식의 폭력이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할 유일한 선택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터이너트에 따르면, '남성은 울면 안 된다'와 같은 남성성 규범은 그 자체로 폭력성을 키우는 데 일조한다. "제대로 인지되지 못한 채 억눌린 감정이 왜곡된 방식으로 분출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스위스 출신 남성성 전문가 마르쿠스 터이너트는 '힘이 센 남자'와 같은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을 달성하지 못한 이들에게 폭력은 남성성을 과시할 유일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남성성에 대한 집착이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전통적 남성성을 내면화한 이들은 약자 혐오에 빠지기 쉽다. "내가 불행한 건여성들이 남성의 몫을 빼앗고 있기 때문"이라는 울분이 여성 혐오를 부채질하는 식이다. 터이너트는 "온라인상 여성 혐오 공간의 통칭인 '매노스피어(Manosphere)'는 남성성 집착에서 야기된 분노를 표출하기 가장 손쉬운 통로"라고 말했다. 여성 인권이 증진될수록 여성 혐오가 기승을 부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남성성은 고정불변 아냐... '코르셋'에서 벗어나라"

터이너트는 가부장적 남성성을 버리지 못한 남성은 고통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남성성 프레임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며 "'여자는 예뻐야 한다'와 같은 여성성 굴레를 깨기 위해 여성들이 오랜 기간 노력한 것처럼 남성들도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남성들이 주변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남성성'을 탐색할 것을 제안했다.

마르쿠스 터이너트에 따르면, 전통적 남성성 신화를 과감히 깨려는 노력과 함께 남성들은 사회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남성성 개발에 나서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러나 새로운 남성성을 확립하는 일을 개인이 하기는 쉽지 않다. 남성성 코르셋의 존재를 자각한 남성들이 다른 남성들을 구제하고, 무엇보다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다. 터이너트는 "특정한 여성성이나 남성성에 갇히지 않도록 젠더 교육을 강화하고 전통적 젠더 프레임에 갇혀 바뀐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담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터이너트는 "남성과 여성이 싸울 대상은 서로가 아니라 가부장적 질서이므로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강하게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를린= 신은별 특파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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