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급 상처 주는 '기후 고통'...5년 뒤엔 인류 정신건강 최대 리스크" [인터뷰]
미국 학계, 9년 전부터 '기후 고통' 위험 주목
"5, 6년 뒤엔 인류 정신건강 최대 위협 요소
이미 심각한 불안 호소... 입원하는 사례도
장기전 예고...충분히 슬퍼하고 연결해야"
기후재난의 시대를 어떤 마음으로 견디고 살아내야 할까.
올해 전 세계는 이상기후에 시달렸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린 지난 두 달간 기자도 기후·환경 이슈를 접할 때마다 무력감을 느꼈다.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았고 미래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올해 여름이 앞으로 겪을 여름들 중에서 가장 안전한 여름이겠지?" 낮 최고 기온이 섭씨 35도를 찍은 7월의 어느 날 뜨겁고 습한 거리를 걷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듯 답답해졌다.
미국 정신의학계는 2014년부터 이런 증상을 ‘기후 고통(Distress·정신적 괴로움)’으로 명명하고 여파를 추적해왔다. '기후 우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에선 '기후 우울' 대신 '기후 고통'을 정식 용어로 채택했다. 우울감뿐 아니라 죄책감, 불안, 분노, 좌절, 억울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감정 반응이라는 의미에서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을 당해 괴로워하는 사람들, 언제 닥칠지 모를 재난에 불안해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고통의 총량이 “세계대전에 준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5, 6년 뒤엔 기후 고통이 우울증·조현병을 뛰어넘는 정신건강의 최대 위협 요인이 되리라는 전망도 있다.
최근 미국 기후 관련 정신건강 전문가 4명에게 인터뷰를 겸한 화상 상담을 받아봤다. 수잔 클래이튼 미국 우스터대 심리학과장, 로빈 쿠퍼 기후정신과전문의연합(CPA) 대표, CPA의 ‘젊은 기후정신과의사 네트워크(ECN)’ 소속인 의사 박찬영씨, 미 기후보건의사회의 미국정신의학과협회(APA) 대표인 로버트 페더 박사다. 기후 고통이란 정확히 무엇인지, 얼마나 심각해질지,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전문가들은 “기후위기는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단숨에 기후 고통을 없앨 마법은 없다는 의미다. 그러니 기후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후변화에 함께 저항할 수 있는 사회관계망을 확보해두라고 조언했다. 닥쳐올 재난을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사회적 연결이 우리를 견디게 해주리라는 진단이었다.
"기후위기를 겪으면 고통스러운 게 당연합니다"
기후정신과전문의연합(CPA)의 쿠퍼 대표는 2016년 정신과 전문의 10명과 기후 고통에 대처하기 위한 전문의 연합을 결성했다. 당시 미국정신의학과협회(APA) 등에서도 기후 고통을 논의했지만 보다 강도 높은 대처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쿠퍼 대표는 "기후 고통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증상이자 감정이다. 기후변화가 사람들에게 고통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기후 고통이 당연한 감정임을 확인하는 것은 각국 정신의학계가 합의한 제1대응 원칙이다. 영국 왕립정신과대학은 부모들에게 "아이들의 기후 고통을 진지하게 들어주라"고 권고한다. CPA 역시 가이드라인에서 “기후 고통이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점을 상담 대상에게 확인해주라”고 강조한다. 고통의 존재와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만으로 기후 고통을 얼마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안전에 대한 불안만으로 우울해지지 않는다”
정신의학적으로 불안은 병적인 현상이 아니다. 변화를 추동하고 위험에 대비하도록 돕는 기제다. 문제는 불안이 만성화될 때다.
클래이튼 우스터대 심리학과장은 "기후 고통은 광범위한 기후 재난이 나의 안전을 해치리라는 실존적 불안에서 시작한다"면서도 "기후변화의 영향을 측량할 수 없다는 불확실성과 인간이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있다는 무력감이 합쳐져 기후 고통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그는 APA에서 기후 고통 보고서 작성을 주도했고 유엔 '기후변화에관한정부간협의체(IPCC)' 보고서의 건강 부문 수석 저자이다.
정부, 화석연료 기업 등 책임 있는 주체가 노력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되면 개인의 무력감이 더 커진다. 클래이튼 교수는 "기후변화에 대한 방임이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훼손시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고 했다.
실제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기자가 느끼는 고통이 커졌다. 한국엔 신규 석탄발전소가 여전히 들어서고, SK E&S·포스코 등 한국 기업들은 액화천연가스(LNG) 수급량을 늘리고 있다. 해상풍력촉진특별법 등 필수 법안은 정부와 국회의 무관심 속에 3년째 방치돼 있다. 청소년들이 제기한 기후헌법소원에 헌법재판소는 3년째 묵묵부답이다.
CPA의 '젊은 기후정신과의사 네트워크(ECN)’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박찬영씨는 기후 고통을 세계대전에 비유했다. 그는 미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4년 차 전공의로 LA보훈병원에서 전쟁 피해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박씨는 △안전에 대한 불안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 등 기후 고통의 양상이 전쟁 피해자의 고통과 유사하며, 고통의 정도도 그에 준하게 심각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이들은 '기후가 변하기 때문에 우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정말 불안하게 하는 건 자신이 속한 사회의 어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청년 45% "기후 고통이 일상에 지장 준다"
2016년 설립 당시 회원이 10명뿐이었던 CPA는 950명 규모 조직으로 커졌다. APA는 2014년 첫 보고서를 발간한 후 2017년에 개정판을 제작했다. 2021년에 발간한 보고서에는 기후 고통을 느끼는 아이들에 대한 부모와 교사의 연령대별 대응 요령이 담겼다. 미 정신의학계가 기후 고통을 심각한 보건 위험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클래이튼 교수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호소하고 있다"며 "기후변화를 막아야 한다는 책임감에 치여 일상에서 기쁨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2021년 영국 배스대가 10개국 청년(16~25세) 1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45%가 "기후 고통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준다"고 답했다. 박찬영씨는 "기후변화의 피해를 당한 뒤 극단적 충동이 강해져 입원하는 사례도 있다"고 했다.
기후변화가 직접적으로 인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박찬영씨는 "높은 기온이 스트레스를 높인다는 의학적 증거는 매우 많다"며 "고온은 신체 호르몬 조절 메커니즘도 바꾸기 때문에 세로토닌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항우울제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좋은 슬픔을 나눕시다" 기후변화 시대, 연결의 힘
미국정신의학과협회 대표인 페더 박사(정신과 전문의)는 "아직까지는 우울증, 조현병, 가족과의 불화 등이 정신의학계의 주요 관심사인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5, 6년 후면 기후 고통은 정신 보건을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가 4명은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기후변화도, 기후 고통도 순식간에 끝낼 묘책은 없는 만큼 길고 지난한 싸움에서 지치지 않도록 '회복 탄력성'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최선책은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사회심리학자인 클래이튼 교수는 15년 이상 사회관계망이 기후 고통을 어떻게 줄일 수 있는지 연구했다. 그는 "지지적인 관계망이 신체·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흡연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만큼 크다"며 "혼자서 기후위기에 대해 걱정하는 것보다 집단을 이루는 편이 훨씬 대처하기 쉽다"고 했다.
실제 해외엔 기후 고통을 나누는 모임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미국 좋은 슬픔 네트워크(Good Grief Network), 영국 기후 카페(Climate Café), 탄소 대화(Carbon Conversation), 탄소 걱정(Carbon Cares), 호주 안전한 기후를 위한 심리학(PSC) 등이다. 기후 고통 상담 전문가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기후위기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공유하고 각자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제공한다.
CPA 역시 기후 고통에 대처하기 위한 행동 지침으로 "안전한 공간에서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라"고 권고한다. 한국엔 기후 고통 공유를 중점 활동으로 삼은 단체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어떻게 '고통'을 '활동'으로 연결시킬 것인가”
최근 미국 기후 관련 정신의학계의 화두는 개인의 고통을 어떻게 사회적 활동으로 연결시키는지의 문제다. 클래이튼 교수는 공교육을 광범위하고 효과적인 연결 창구로 꼽았다.환경 교육을 강화한다면 적어도 아이들만큼은 기댈 곳이 생긴다는 취지다. 그는 "아이들은 이미 기후변화에 대해 알고 있고 더 많이 공부하고 싶어 한다"며 "교육 시스템이 갈증을 해소해줄 수 있다"고 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기후대응 행동에 참여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클래이튼 교수는 "나쁜 일이 일어나는데도 가만히 있으면 수동적 피해자에 그친다.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이겠지만 뭐라도 하면 긍정적인 감정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페더 박사도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희망 없이는 고통을 견디기 힘들다. 희망을 갖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행동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후위기에 억눌린 당신 스스로를 격려하라"
쿠퍼 CPA 대표는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격려해야만 한다"고 조언했다. "고통을 느끼기 싫어 외면해버리는 것도, 부채감과 불안에 짓눌려 감정을 소진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후 고통을 느낀다는 건 당신이 환경과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가올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만큼 책임감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러니 충분히 슬퍼하세요. 미래를 걱정하고 당신이 바랐던 삶을 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애통해하세요. 아무런 상처 없이 우리가 기후위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위기가 얼마나 심각해질지는 결정할 수 있어요. 긴 싸움이겠지만 함께 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싸우는 과정에서 문제 해결에 참여하는 자부심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부디 스스로를 잘 격려해주세요.”
김현종 기자 be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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