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일본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 100주년

홍순권 동아대 명예교수 2023. 9. 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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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 ‘제노사이드’ 전형, 역사 부정하는 권력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는 기억
우리 정부의 침묵에 허탈
홍순권 동아대 명예교수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역에서 규모 7.9의 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사망자와 행불자만 10만5000여 명인 데다 수십만 호의 가옥과 건물이 붕괴되는 일본재해 사상 최악의 피해를 기록했다. 관동대지진 발생 100주년을 맞아 일본 방송과 신문 등은 연일 당시 상황을 되새기는 프로그램과 관련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우리나라 일부 언론에서도 특집 방송을 편성하거나 해설 기사를 내보내는 등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다만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관동대지진의 전체적 피해 상황보다는 당시 일어났던 조선인 대학살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 일본과 다르다.

관동대지진에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지진 발생 직후 지진의 직접 피해자가 아닌 6000명 이상(추정치이며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의 조선인이 일본인들에 의해 무고하게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학살은 각 마을의 청장년들로 구성된 자경단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치안을 명분으로 칼 죽창 낫 등으로 무장을 하고 다니면서 조선인을 만나면 무참하게 학살을 자행했다. 지진이 발생한 당일부터 도쿄와 요코하마에서는 ‘조선인들이 불을 지른다’,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졌는데 이것이 학살 행위를 부추겼다. 당시 일본 정부는 재난지역을 중심으로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계엄령하에서 오히려 조선인에 대한 학살은 광범위하고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이 학살 사건에 대해 당시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 정부에 항의한 기록도 남아 있다. 지금까지 학술적인 연구 성과 또한 적지 않지만, 여전히 일본 정부나 일본 극우 세력은 이러한 사실에 침묵하거나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1922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작가 이기영이 1961년 내놓은 대하소설 ‘두만강’에는 당시 그가 겪었던 조선인 대학살의 참상을 실감 나게 묘사한 대목이 있다. 즉, 가족을 잃은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도쿄 히비야 공원에 숨어 들어간 주인공 창복이가 전율하며 엿들은 대목은 이렇다.

“글쎄 ‘불령선인’들이 지진이 일어나자 즉시로 저희들끼리 연락을 취하는 암호로써 구역마다 분필로 표를 해놓고 있다가 지진이 일어나자 일시에 각처에서 불을 질렀다 하고 우물에다 독약을 처넣었다 하니 그런 악독한 놈들이 어디 있어요. 지금 이 자리에도 ‘조센징’이 있다면 나는 이 철장대로 그놈을 보기 좋게 때려죽이겠소.”

당시 일어났던 학살 만행은 아무리 감추거나 부정해도 그 진실을 완전히 은폐하거나 지워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시 조선인 학살 상황을 증언하는 수많은 구술 기록이 남아 있고, 심지어 당시 그 학살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 기록으로 남긴 화가들도 여럿 있다. 그들이 그린 그림 중 일부가 지금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 도쿄 고려박물관 관장을 역임했던 아라이 가츠히로는 이미 1년 전에 관동대지진 그림에 담긴 학살 장면을 분석한 책을 발간하면서 그 이유를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의식, 즉 혐한 의식이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를 밝히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들여다보면, 대지진 발생 이후 약 2주일간 일본 관동지방 전역에서 일어난 학살의 희생자는 조선인만은 아니었다. 피해 규모는 조선인에 미치지 못하나 일본어가 서툰 중국인과 오키나와인, 그리고 일본인 사회주의자들 또한 사회적 광기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관동대지진 당시의 학살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자행한 야만적인 ‘제노사이드’ 범죄의 한 전형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지난 2월 지인 몇 사람과 일본 여행을 떠났는데 도쿄를 방문한 김에 도쿄 교외의 아라카와 하천변을 찾았다. 그곳은 1982년 9월 관동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 유골을 발굴했던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그 천변 부지 주택가의 한구석 빈 공간에 조선인 희생자를 위해 세워진 작은 추도비가 있었다. 도쿄의 시민단체가 사유지 공간을 모금 활동을 통해 사들여 추도비를 설치했다고 한다. 지금 이곳은 ‘호센카’(봉선화)라는 스미다구의 시민단체가 관리하고 있는데, 이처럼 진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시민단체가 있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역사를 부정하는 시대의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기억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관동대지진 100주년을 계기로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와 일본 사회의 자성을 촉구해 본다. 그러면서도 관동대지진 100년을 맞는 올해 광복절을 전후하여, 그리고 관동대지진 기념일을 전후해서 우리 정부가 조선인 대학살에 대해서 단 한마디의 언급조차 없었다는 사실로 마음 한구석 허탈하기 그지없다. 도대체 무슨 곡절이 있기에 침묵하는 것인지 그 까닭이 너무나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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