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영상화 스토리 모음집 ‘언저리 프로젝트 Vol.02 무경계’ 출간···이아영, 민병우, 김형준, 한기중, 손정우 작가
‘언저리 프로젝트’는 “당신이 영화감독이라면 다음의 스토리 중 어떤 작품을 선택하여 영화를 만들고 싶은가?”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시리즈 출판물이다.
그 두 번째 결과물로 다섯 편의 스토리가 담긴 ‘언저리 프로젝트 Vol.02 무경계’(시공사)가 출간이 됐다. 이번 언저리 프로젝트는 키워드를 ‘무경계’로 잡고, 장르와 소재의 구분 없이 자유롭게 합류할 작가들을 찾다 영화감독, 문창과 출신의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희곡(戲曲)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은 작가 등이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얼핏 보면 자유분방한 글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무정부주의 산문집 같지만 각 작가들이 만들어낸 사전 시각화를 위한 글에 문학적 장점을 더한 스토리텔링이 독자들에게 읽고 상상하는 재미를 탄탄하게 전달해 준다.
작품 중에 시나리오 전 단계인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 형식의 세태풍자 콩트도 있고 트리트먼트와 시나리오 간의 경계를 오가는 형태의 판타지물도 있다. 또, 이와 대비되는 단편소설처럼 문학적 향취가 느껴지는 작품도 있다. 우리나라 최초 소설이라는 김시습 ‘금오신화’가 연상 되는 SF 판타지물도 있다.
각 작품 속으로 들어가보면 이아영 작가의 ‘검은 봉지’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예민한 후각을 가진 여자가 향수 시향을 통해 사회의 민낯을 보게 되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물들어가는 이야기다.
쓰레기 집에 살고 있는 ‘나’는 직업소개소의 도움으로 향수 회사에서 시향을 하게 된다. 악취로 가득한 세상에 향취가 잔향을 남길 때쯤, 쓰레기 집으로 손님들이 찾아온다. 엄마는 쓰레기 집을 타인에게 들켰다는 수치심에 방구석으로 숨어버린다. 한편 시향이 끝난 향수가 출시되고, 향수 회사의 총괄자인 실장은 ‘나’를 불러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이아영 작가는 “검은 봉지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길에는 많은 냄새가 있다. 보고 싶지 않은 건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이고, 말하고 싶지 않은 건 입을 다물면 그만인데 냄새는 경계가 없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맡을지를 정할 수 없었다. 이 글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이야기”라고 작품을 소개했다.
김형준 작가의 ‘대리기사 김여사’는 한 중년 여성이 한때는 온갖 불법과 편법으로 부를 취하고 세상을 조롱하며 살았지만 차가 전복되는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 한순간에 사정이 바뀐 후의 스토리다. 기억상실증으로 과거의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린 그녀에게는 사채업자들이 찾아오는 낡고 허름한 친정 엄마의 집 한 칸, 엄마를 무시하는 사춘기 딸과 치매에 걸린 친정 엄마만이 남아있다.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그날의 교통사고에는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
작가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남 탓하는 것이 기본인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정치에서도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자신은 책임이 없고 서로가 남의 탓을 합니다. 이러한 습관적 일상적인 변명 말고 진짜로 세상 때문에 남들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보거나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에게 일어난 일은 억울하든 좋든 싫든 그것을 묵묵히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여기, 한 중년 여자가 있습니다. 한때 부유한 처지였지만 한순간에 사정이 바뀝니다. 이 여자가 어떻게 살아나가는지 뒤따라 가봅니다”라고 작품을 안내했다.
손정우 작가의 ‘꽃밭에서’는 전염병과 기근에 시달리던 중종 36년 헤이리에 비거(飛車,UFO)가 불시착한다. 비거가 내려앉았던 곳에 피어난 다양한 꽃들과 남겨진 한 여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손 작가는 “‘헤이리 비거전(飛車傳)’이라는 영화 시나리오를 짧은 소설 형태로 각색한 작품이다. 중요한 사건들로 구성하였고 원본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편집하였다”고 작품 정보를 밝혔다.
한기중 작가의 ‘인피니티 루프’는 탐사보도 전문 기자 진하가 희귀병에 걸린 채 기도원에서 실종된 어린 딸과 딸의 치료 백신을 찾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변종 바이러스로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사교집단의 음모에 맞서게 되면서 진하는 무간지옥에 빠지게 된다. 현실과 무의식세계와의 무한루프에 빠져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가 미스터리하게 이어진다.
한기중 작가는 “우리는 무한루프에 갇혀있다. 꿈과 현실을 혼동하라. 꿈에서 깨어나면 현실이 되고, 현실이라는 꿈에서 깨어나면 진짜 내가 있음을 알아야 이 무한루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민병우 작가의 ‘그럴싸한 이야기’는 중고차 매장 직원인 바른은 매장에 들어온 슈퍼카를 SNS에 올리며 마치 자신의 차인 것처럼 같이 드라이브를 할 여성을 찾으며 출발한다. 왁싱샵을 운영하는 민혜도 피부과 원장행세를 하며 SNS에서 데이트를 할 상대를 찾고 있다. 이들의 파트너인 나연과 제득도 SNS 속에서는 그럴싸한 인물들이지만 현실에서는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있다. 4명의 개성 있는 캐릭터를 통해 SNS에 빠져사는 현대인들의 삶과 꿈의 이면을 그려낸다.
작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명감독 알렉스 퍼거슨은 언젠가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다. 인생에는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 차라리 독서를 하기를 바란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이야기는 그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모두 행복하고 잘 살고 멋지고 예쁘고 걱정이 없어 보인다. 모두 좋은 것만 선택적으로 올린다. 다소 과장된 이야기일 수 있지만, 4명의 개성 있는 캐릭터를 통해 현대인들의 이면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밝혔다.
많은 창작자들이 오늘도 자신의 뇌세포를 죽여 가며 영화, 방송, 게임, 웹툰, 웹소설 등 여러 분야에서 세상 어디에도 존재한 적 없었던 스토리를 구축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천 스토리와 기획 아이템이 상품화될 확률은 매우 낮은 편이다. 특히 영화·영상 분야는 창작자 대비 사업화 비율이 저조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유명 제작사의 사무실에는 감독 지망생들의 투고 시나리오가 넘쳐 나고, 각종 공모전마다 무수히 많은 작품이 접수되는 등 세상을 향한 간절한 기회를 찾는 창작자들의 노력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 영화·영상판 스토리 창작자들이 소중히 숨겨둔 작품을 발굴하여 세상에 알리는 적극적 방식의 프로젝트를 시도한다. 애초에 영상화를 목표로 써놓은 스토리 콘텐츠를 소설 형태로 각색하고,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상품화시켜 세상에 알리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아주 심플한 진행 방식이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수많은 영화·영상 종사자들을 만나고, 그들이 하드디스크 깊숙이 숨겨둔 스토리들을 공개 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영화·영상화 문법으로 쓰인 스토리들을 일반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수정하는 것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 시간과 노력의 결과로 다섯 편의 스토리를 완성하여 이렇게 독자들에게 선을 보인다.
손봉석 기자 paulsoh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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