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넘어서자”… 美할렘 식탁서 마주앉은 한인-흑인들[글로벌 현장을 가다]
이 만남은 뉴욕시가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인종 혐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올해 시작한 ‘빵을 나누며 연대하기(Breaking Breads, Building Bonds)’ 캠페인의 일환이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비영리 문화복지단체 ‘이노비(EnoB)’ 김재연 국장은 “이번 행사에 참여하면서 한인과 흑인들이 소수인종으로 느꼈던 정서, 뉴욕에 오게 된 사연을 나누며 서로 이해도가 높아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행사가 열린 만나스는 한인인 베티 박 사장(70)이 할렘에서 40여 년 운영해 온 식당으로, 흑인과 아시아계의 화합을 상징하는 장소로 꼽힌다.》
‘인종 편견 없애기’ 실험
뉴욕은 미국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대표적인 도시로 꼽혀 왔지만 팬데믹 직후인 2021년, 전년 대비 혐오 범죄 건수가 100% 이상 급등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지역사회에서 인종 간 교류가 줄어드는 가운데 온라인상에서 퍼지는 혐오가 확증 편향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우려도 확산됐다. 지난달 10대 흑인 소녀가 뉴욕 지하철에서 한국계 가족을 공격해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미국 내 혐오 범죄의 20%가 아시아계에 대한 공격이었고, 30%는 성소수자(LGBTQ+)를 상대로 한 폭력이었다.
이처럼 인종이나 성 정체성이 다른 집단을 향한 위협과 그로 인한 공포심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에릭 애덤스 뉴욕시장은 올 초 ‘빵 나누기’ 캠페인을 발표했다. 애덤스 시장은 “두려움은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식사를 함께 하며 상호 간의 벽을 허물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며 캠페인 취지를 강조했다. 소그룹이 개인적 교류를 확대해 함께 밥을 먹다 보면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체감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캠페인은 뉴욕시가 1000끼 식사를 목표로 식사비를 내주고 서로 다른 그룹의 만남을 주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할렘 지역에서 한인과 흑인들이 함께 ‘빵 나누기’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난 것은 두 집단이 미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반목해 왔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아시안과 흑인들은 소수인종 차별이라는 연대감이 실제 존재하는데도 상호 간의 편견이 강화돼 왔다”며 “팬데믹 이후 아시아 혐오 범죄 급증으로 이 같은 편견이 더욱 심해졌다”고 지적했다.
할렘 ‘한인 대모’도 나섰다
기자가 5일 미 뉴욕 할렘 지역 125번가와 126번 사이에 위치한 만나스를 방문했을 때 한 주민이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박 대표에게 환하게 인사를 건넸다. 식당에 머무는 1시간여 동안 10명 이상의 주민이 박 대표에게 말을 걸어왔다. 대부분 흑인 주민들이었다. 음식을 포장해 가던 한 단골 여성 고객은 “음식은 이곳이 최고”라며 웃어 보였다.
할렘의 ‘40년 터줏대감’인 만나스의 박 대표는 “서로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함께하다 보면 딱히 반목할 게 없다”고 말했다. “식당을 운영하며 권총 강도를 만나기도 했고, 믿었던 직원이 배신하는 어려움도 겪었지만 알고 보면 정겨운 동네”라고도 덧붙였다. 팬데믹 이후 인종 갈등이 더욱 심해지자 시와 함께 ‘빵 나누기’ 캠페인에 참여한 이유다. 2021년 할렘 지역 정치인들과 시민단체 등이 인종 간 화합을 장려하는 취지로 박 대표에게 공로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박 대표는 1980년대 초 할렘 흑인들이 한인 상인들에 대해 ‘우리를 상대로 돈을 벌면서 우리를 무시하고 지역사회에 기여하지 않는다’며 거센 시위에 나설 당시 마이크를 잡고 설득에 나선 경험도 있다. 30대 ‘신입’ 여사장이던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제가 안되는 영어로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일제 강점과 6·25전쟁 같은 슬픈 역사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래서 표정이 굳어 보일 수 있지만 지역 주민들을 적극 고용하겠다’고 하자 박수가 쏟아졌어요.”
박 대표는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의외로 개인 차원에서 대화로 이해하는 방법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강조했다.
인종별 학군까지 갈려
미 월스트리트 거물들도 뉴욕시의 고질적인 혐오 범죄 예방에 나서고 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 회장 등이 지원하고 있는 비영리단체 ‘페이싱 히스토리&아워셀브스’는 올해 말부터 혐오 범죄 관련 교과서를 만들기로 했다. 미 중고생 과정인 뉴욕시 공립학교 6∼12학년이 대상이다. 중학교는 45분, 고등학교는 1시간씩 5∼10회 수업하며 혐오의 역사적 뿌리와 문제에 대해 집중 다루겠다는 취지다.
투자 자문사 브레이브 워리어 캐피털 창업자 글렌 그린버그는 최근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혐오 방지 교육 프로그램에 무제한 기부를 선언했다”며 “자신을 방어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싫다. 선동적인 수사와 소셜미디어, 심지어 음악 가사까지 (혐오 범죄) 위험성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괴롭힘과 혐오 발언, 나아가 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미 최대 교육구인 뉴욕시 공립학교는 인종이나 사회경제적 계층에 따른 분리 현상이 심각한 수준이다. 사는 지역이나 학교 수준에 따라 생활환경이 나뉘어 서로 다른 집단끼리 교류할 일이 줄고 있다.
미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뉴욕시는 백인이 31.9%, 히스패닉 28.9%, 흑인 23.4%, 아시안 14.2%로 미 전체 백인 비중이 60%인 것과 비교하면 다양성이 높은 지역으로 꼽힌다. 하지만 뉴욕대 분석에 따르면 부촌인 어퍼이스트사이드나 웨스트빌리지 지역은 백인 비중이 약 70%인 반면 흑인 비중은 3∼4% 수준이다. 입시를 치르는 미 뉴욕 특목고 스타이버선트 고등학교는 올해 신입생 762명 중 흑인이 총 8명에 그쳤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민권 프로젝트 연구팀은 2021년 보고서에서 “뉴욕주 학교 시스템은 인종 분리가 가장 심각하다”면서 흑인 3명 중 2명꼴로 백인 재학생이 10% 미만인 학교에 다닌다고 지적했다.
김현수 뉴욕 특파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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