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괜찮아, 잘될 거야

기자 2023. 9. 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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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만 잘생긴 3초 진돗개, 우리집 나비는 늑대의 후손입니다. 수렵견의 혈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산책길에 까치라도 보이면 눈빛부터 바뀝니다. 흙바닥에 몸을 비벼 자신의 냄새를 지우고, 수풀에 낮게 엎드립니다. 되레 푸드덕 소리에 겁먹고 제 뒤에 숨어들기 일쑤이지만, 일단의 과정은 그럴싸합니다. 가르친 적도 없는데 흉내라도 내는 것을 보면 타고난 성품인 것이고, 함께 사는 입장에선 나비가 사냥에 소질이 없어 다행입니다.

김재윤 수의사·우리동물병원생명사회적협동조합 대표원장

타고난 성품 때문에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글이나 스패니얼 혈통의 개들은 본디 산과 들을 헤집어, 혼비백산한 여우나 새들을 사냥꾼의 시야에 노출시키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외모가 수려한 죄로 도시로 끌려와 실내에 살기 시작하면서, 온 집안을 헤집어 놓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수백년간 사냥터를 누비며 칭찬받던 그 성품이, 오히려 함께 살기 힘든 개라는 오명이 되었으니 억울할 만도 합니다. 경찰견이나 마약탐지견, 인명구조견으로 일하는 개들을 보면, 어찌 저리 착할까, 똑똑할까, 감탄하게 되지만 그들 또한 할 일을 빼앗아 집 안으로 들인다면, 결과는 뻔합니다. 사람이고 동물이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일하고, 주위의 인정과 칭찬이 있어야 사는 맛이 나겠지요.

발생학에는 ‘Totipotenc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수정란의 난할 초기에 세포가 분화를 통해 한 개체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인데, 한 세포가 다른 어떤 종류의 세포로도 분화가 가능하다는 뜻에서 ‘전능성’ 혹은 ‘만능성’이라 부릅니다. 학창 시절, 이를 강의하시던 교수님은, 너희들은 20대이니 totipotency가 충만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 꿈과 희망으로 학문에 정진하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응원을 받던 제가 그 시절 교수님 나이가 되고 보니, 응원이랍시고 하는 것이 자칫 강요가 되면 큰일이라 생각됩니다. 동물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여러 간호사와 수의사를 만납니다. 한번은 성격이 밝고, 사람이 참 좋은 간호사를 만났습니다. 열심히는 하는데, 병원 일은 좀처럼 손에 익지 않고, 같은 실수를 반복했습니다. 꾸짖어봐도 타일러봐도 나아지지 않으니, 나중엔 타박만 하게 됐습니다. 생각해보면 그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에게 꼭 맞아 잘할 수 있는 일이 동물병원이란 공간에 없었을 뿐입니다. 젊은이에게 뭐든지 잘하라고, 응원이 아닌 강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스스로가 쓰임새 없게 느껴졌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아이의 재능이나 흥미를 살피기보다는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부모도 많습니다.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맡겨주지는 못하면서, 그저 화만 내는 직장 상사도 많습니다. 사과나무를 심고서 배가 열리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격입니다. 그런 바보가 어디에 있나 싶겠지만, 우리는 사냥개를 집 안에 가두고선 얌전하지 않다고 탓하는 바보들입니다. Totipotency는 세포 단위의 개념입니다. 사람에게 그 전능성을 기대하고, 강요하는 바보였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문득 미안해졌다면, 오늘은 사과를 해보면 어떨까요? 사과가 오히려 더 나은 응원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 간호사에게 괜찮다고, 잘될 거라고, 너에게는 눈부신 미래가 있다고 말해주겠습니다.

김재윤 수의사·우리동물병원생명사회적협동조합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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