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아영의 레인보] 거부하라, 우리 안의 여성혐오
지난해 9월14일 스토킹을 당하다 서울 신당역에서 살해당한 서울교통공사 직원의 1주기가 다가온다. 그의 죽음 이후 스토킹 처벌법에서 반의사불벌 조항이 삭제되고 스토킹 피해자 보호법이 제정됐다. 그의 죽음으로 법이 개정되고 새로운 법이 만들어졌으니 세상이 많이 바뀌어야 했건만 ‘안전한 일터’는 요원하다. 노동법률단체 직장갑질119 등이 지난달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여성 직장인 3명 중 1명은 ‘직장 내 성희롱’을, 10명 중 1명은 ‘직장 내 스토킹’을, 4명 중 1명은 ‘직장 내 성추행·성폭행’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지난달에도 일하러 가던 여성이 성폭행당해 사망했다. 최윤종은 서울 관악구의 한 생태공원 야산 등산로에서 알지 못하는 여성을 금속 재질 흉기로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성폭행했다. 피해자는 사건 발생 이틀 만에 숨졌다. 지난 5월에는 서울 금천구에서 교제폭력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30대 남성이 조사 직후 상대 여성을 살해했다. 그는 피해 여성이 이별을 통보하자 앙심을 품고 살인하기로 마음먹었고 이 과정에서 불법촬영물을 유포하겠다고 협박도 했다.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최근 프랑스 내무부도 “사흘에 한 명꼴로 여성이 남편이나 동거인 등 남성에 의해 살해됐다”는 ‘커플 내 폭력 사망’ 통계를 발표했다. 2022년 한 해 총 118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전남편, 동거인에게 살해당했다. 피해 여성 중 37명은 사망 전 이미 배우자나 동거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적이 있었고 24명은 경찰에 신고를 했으며 16명은 고소장까지 냈지만 끝내 목숨을 잃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프랑스 일간 르파리지앵이 인용한 여성 인권 전문 변호사 안 부이용의 말이었다. 그는 “이별은 여성에게 매우 위험한 순간”이라면서 “남성들은 상대방이 자유를 누리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이는 상대방을 소유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91개 여성인권시민단체는 관악구 등산로 사건 이후 ‘공원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방치 국가 규탄 긴급행동’을 열어 “장갑차와 호신용품이 아닌 성평등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고 젠더폭력을 지우려는 정부에 “정부가 성평등 정책을 축소하면 또 다른 죽음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책은 범죄에 강경 대응을 하겠다는 것이다. 폐쇄회로(CC)TV를 많이 설치하고 흉악범을 수용하기 위한 교도소를 증설하며 의무경찰제를 도입하면 이 같은 범죄를 막을 수 있을까.
케이트 맨 미국 코넬대 부교수는 <다운 걸: 여성혐오의 논리>에서 묻는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가부장제가 종식됐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조차 성폭행과 스토킹, 친밀한 파트너의 폭력 피해자는 왜 일반적으로 여성인가. 법과 제도를 바꾸고 젠더평등에 있어 다방면의 진보가 이뤄졌는데도 왜 여전히 여성혐오는 우리 주위를 도사리고 있는 걸까. 그는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여성혐오를 정의한다. 여성혐오는 여성에게 비대칭적인 도덕적 지원자 역할을 부여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여성혐오는 어머니, 여자친구, 아내, 딸과 같은 사회적 역할들을 강요해 여성에게서 도덕적 재화와 자원을 뽑아내려는 것이며 혹시 그러한 여성이 부재했을 경우, 여성이 그러한 역할을 거부했을 경우 ‘배신’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혐오는 끔찍한 범죄의 기저에만 깔린 것이 아니다. 여성 축구선수에게 강제 키스한 후 문제가 되자 동의를 구했다고 우기는 스페인 축구협회장, 서울시의회 정책토론회에서 “지지를 받으려면 일단 얼굴이 이뻐야 된다”는 부적절한 발언을 하고 외모 평가를 한 것은 아니라는 시의원의 발언 기저에도 여성혐오는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도 동의를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건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곡해해도 ‘괜찮은’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권력 뒤에서 여성은 손쉽게 대상화된다. 대상화된 존재는 주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기에 근본적으로 불안정해진다.
최근 성평등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주디스 버틀러 미국 UC버클리대 석좌교수 인터뷰 기사를 전송한 후 많은 악성 메일을 받았다. 메일 제목에서 어떤 ‘혐오’를 담고 있는지 예측 가능해 열어보지 않았다. 회사 법무팀을 통해 악성 댓글, 메일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메일을 보낼 수 있지만 하지 않았다. ‘여성혐오 메일’에는 어느 정도 단련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혐오’에는 단련될 일이 아니다. 질문해야 한다. “여성은 언제쯤 인간이 될까? 도대체 언제쯤이면?” 페미니스트 법률 이론가 캐서린 A 매키넌은 1999년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물었다. 이 질문은 2023년에도 유효하다.
임아영 소통·젠더 데스크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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