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왕의 DNA와 세조의 훈계
얼마 전 교육부 5급 사무관이 자신의 초등학교 아이의 교사에게 보낸 편지가 논란이 되었다. 편지에서 그는 자기 아이가 ‘왕의 DNA’를 가졌다며 9개 요구사항을 나열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조선시대 세조 역시 어린 세자에게 10개 항목의 가르침을 남겼다. ‘<훈사> 10장’이 그것이다. ‘훈사’란 훈계의 말이다. 세조 사후에 즉위한 예종이 그 세자이고 당시 8세였다. 말 그대로 ‘왕의 DNA’를 가진 아이였다.
<세조실록>에 훈사의 내용이 요약돼 나온다. 서문에 이어서 각 장마다 제목을 붙여 그에 대한 해설이 뒤따른다. 서문은 이렇다. “부모가 너를 위해 교육시킬 것을 생각한 것이 한 가지가 아니다. 네가 외로운 몸으로 장차 종묘사직을 맡으면 사람과 하늘이 애처롭고 가엾게 여길 것이다. 나의 뜻을 본받도록 해라. 나는 어려움을 당했지만 너는 태평한 때를 만나야 한다. 일이란 세상에 따라 변한다. 만일 네가 나의 선례에 구애된다면 네모난 나무를 둥근 구멍에 집어넣으려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훈사를 간략하게 지었으니 너는 평생토록 절대 잊지 말아라.” 세조가 부인 정희 왕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린 아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남기게 된 사연을 말하고 있다. 세조는 즉위하는 과정에서 잔인하고 무리한 일을 자행했지만, 어린 아들은 좋은 임금이 되어 순탄하게 왕노릇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각 장의 제목과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장 항덕(恒德·한결같은 덕을 가져라): ‘아내를 소중하게 여기고 대신(大臣)을 공경하며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라’, 2장 경신(敬神·신을 공경하여 섬겨라): ‘신을 업신여기고 백성을 학대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복이 없어진다’, 3장 납간(納諫·쓴소리를 받아들여라): ‘바른말로 너에게 쓴소리하는 사람이 없으면 세상일에 어두워져 아는 것이 전혀 없고, 폐단을 알 수 없게 되어 나라가 망한다’, 4장 두참(杜讒·참소를 막아라): ‘백성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항상 너그럽게 용서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백성들 뜻을 살피면 참소(남을 헐뜯어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고해바치는 것)가 없어진다’, 5장 용인(用人·사람을 가려서 써라): ‘사람을 쓸 때는 그 마음을 취하고 재주를 취하지 말아라. 부모에게 화목하고 자상하며 은혜로운 사람을 써라’, 6장 물치(勿侈·사치하지 말아라): ‘임금이 귀하게 되고 나라가 부유해지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너는 백성을 위해 정치를 부지런히 할 뿐이다’, 7장 사환(使宦·환관을 조심해서 부려라): ‘환관을 통해서 전하지 말고 항상 신하들을 직접 만나 정치에 관한 사항을 듣고, 그렇지 못할 때는 편지를 이용해라’, 8장 신형(愼刑·형벌을 신중히 해라): ‘사람을 지나치게 벌주는 일이 없게 해라’, 9장 문무(文武·학문을 일으키고 무예를 익혀라): ‘술을 좋아하지 말고 대신을 자주 만나며, 군대 조련을 엄하게 하라’, 10장 선술(善述·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라): ‘내가 너의 할아버지 세종 임금의 뜻을 따랐듯이 너는 나와 네 어머니의 뜻을 계승하라’.
훈사의 내용은 8세 아이에게 당부하는 말로는 너무 어렵다. 하지만 세조는 자신의 아이가 후일 성공적인 임금이 되길 바랐기에 스스로 생각하는 이상적 임금의 모습을 제시했다.
그런 임금이 되기 위해 그는 첫째로 아내와 대신과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바른말을 하는 신하를 가까이하라고 말했다. ‘바른말’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참고 듣기 힘들다. ‘신을 공경하여 섬겨라’라는 말은 국가의 원칙을 존중하라는 말이다. 조선시대로 말하면 유학이고, 지금으로 말하면 민주주의이다. 국가의 원칙을 존중하고 평소 백성들 신뢰를 받아야 나라가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을 만나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이다. 세조가 이 정도라면 우리는 조선시대 임금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 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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