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농민들은 아직 무궁화호를 타고 있다
지난해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의장직을 맡으면서 팔자에도 없는 서울살이를 시작했습니다. 벌써 1년 반이 넘도록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평일은 서울에서 전농 의장으로 활동하고, 주말에는 창원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오도이촌’(五都二村·일주일에 5일은 도시에서, 2일은 시골에서)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KTX입니다. 서울에서 창원까지 3시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데 하루, 창원으로 내려가는 데 하루를 잡아야 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자 상전벽해입니다. KTX가 없었다면 전농 의장으로 활동하느라 농사는 꿈도 못 꿨을 텐데, 제게는 참으로 고마운 친구입니다.
그런데 이 또한 창원 같은 비교적 큰 도시에서 농사짓고 있는 사람들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더군요. 전농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지역을 순회하다 보면, KTX가 닿지 않는 곳에 수많은 회원이 살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열차가 빠르게 달릴 수 없는 산골마을과 해안마을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분들에게도 발이 되어주는, 느리지만 고마운 철도 노선이 있습니다. 바로 무궁화호입니다. 경전선, 충북선, 경북선, 장항선 등 서울에 올라와 전국을 돌아다니기 전에는 이름조차 생소한 노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느리지만 묵묵하게, 때로는 꼬불꼬불 산길을 지나고, 때로는 작은 실개천을 건너며 농어촌 지역 주민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전국의 농민들을 만나러 다닐 수 있게 도와주는, KTX보다 더 고마운 친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마운 무궁화호가 곧 폐지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열차의 노후화와 운행 편수 감소가 주된 이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 더 큰 이유는 적자라더군요. 유가가 올라서 운영 비용은 상승했는데, 탑승객은 적고 운임은 저렴해서 운행할수록 적자가 난다는 것입니다. 이미 같은 이유로 2021년에도 대거 폐지되고 축소되었는데, 이제 2028년이면 완전히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무궁화호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역과 서울을 오가며 통근하는 직장인, 자식에게 전해줄 반찬 보따리를 들고 타거나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는 어르신, 첫 휴가의 설렘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군인 청년까지 여전히 수많은 서민과 농어촌 주민들이 무궁화호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무궁화호가 없어진다면 이들은 인근 대도시를 경유해야만 합니다. 더 멀리 돌고, 더 오래 돌아야만 각자의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겪지 않았던 불편을 겪게 되는 것이지요.
KTX가 인체의 대동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면, 무궁화호는 모세혈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국토 구석구석 사람과 물자를 옮기며 순환시켜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무궁화호가 사라진다면 이 순환 고리는 끊어지고,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대통령 공약에도 있던 국토균형발전 역시 공염불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철도는 수익이 아니라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공공산업입니다. 적자를 이유로 공공성을 저해하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됩니다. 반드시 적자를 메워야 한다면 공공성을 해치지 않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KTX와 SRT로 분리된 고속철도의 통합입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문에 쪼개진 SRT와 KTX를 통합해 코레일이 운영한다면, 그 수익으로 무궁화호의 적자를 충분히 메울 수 있을 것입니다.
무궁화호를 폐지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있습니다. 폐지하지 않을 방법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무궁화호는 존속돼야 합니다. 농촌에서는 아직 무궁화호를 타고 있습니다.
하원오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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