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대통령 "우리도 홀로코스트에 책임 있어"

김태훈 2023. 9. 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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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에 우리도 책임… 부인 못해"
2차대전 당시 독일 일부였던 오스트리아
과거사 반성·청산 미흡… "이제부터 시작"

“오늘날 오스트리아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보존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이츠하크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뜻을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뜻하는 홀로코스트 하면 흔히 전범국 독일부터 떠올리지만, 오스트리아 또한 그와 무관치 않다는 얘기다. 2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였다.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오스트리아 대통령(왼쪽)과 이츠하크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 헤르초그 대통령은 올해 이스라엘 독립 75주년을 맞아 판데어벨렌 대통령의 초청으로 5일(현지시간) 오스트리아를 국빈 방문했다. 빈=AP연합뉴스
◆"홀로코스트에 우리도 책임… 부인 못해"

판데어벨렌 대통령은 5일(현지시간)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헤르초그 대통령과 함께 빈 시내에 있는 홀로코스트 희생자 명비를 찾았다. 헤르초그 대통령은 올해 이스라엘 건국 75주년을 맞아 판데어벨렌 대통령의 초청으로 오스트리아를 국빈 방문했다.

두 대통령은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집단학살 피해자 약 6만5000명의 이름이 새겨진 명비에 헌화하고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이 명비는 비교적 최근인 2021년 11월 9일 ‘크리스탈나흐트’ 83주년 기념일에 맞춰 제막했다. 우리말로 ‘수정(水晶)의 밤’을 뜻하는 크리스탈나흐트는 나치 치하 독일에서 1938년 11월 9일 밤에 일어난 유대인 박해 사건을 지칭한다. 나치 당원과 그 산하 기구 대원들이 도끼와 쇠망치로 무장한 채 유대인 소유 상점과 예배당 등을 공격해 유리창을 다 깨뜨렸다.

당시는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병합된 상태였던 만큼 오스트리아에서도 같은 테러가 벌어져 유대인들이 커다란 재산상 손실을 입었다. 일부는 나치 대원에 붙잡혀 그 자리에서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다.

판데어벨렌 대통령은 ‘오스트리아는 과거사 반성에 소극적’이란 세간의 지적을 의식한 듯 “우리는 오스트리아에 살던 유대인 수만명이 박해를 받고 추방을 당한 것을 잊을 수 없으며 그럴 생각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어 “비록 오스트리아의 과거사 조사와 청산이 늦긴 했지만, 오늘날 오스트리아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보존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명확히 인정했다.
아돌프 히틀러. 나치의 창시자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총통이던 히틀러는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2차대전 당시 독일 일부였던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는 왜 홀로코스트 사안에 있어 이웃나라 독일보다 과거사 반성이 늦었을까. 앞서 밝혔듯이 2차대전 당시엔 오스트리아가 독립국이 아니고 독일의 일부였다는 점에 근본 원인이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에서 나치를 창당하고 독일 정계에서 활동했으나 정작 출생지는 오스트리아였다. 그는 언어와 문화가 같은 독일와 오스트리아가 왜 다른 나라로 갈라져 있는지 늘 의문을 품었다. 나치가 정권을 잡고 군비증강을 가속화하던 1938년 3월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전격 합병을 선언했다. 그때부터 1945년 5월 독일이 2차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였다.

전후 미국, 영국, 소련(현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까지 4대 연합국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도 분할 점령했다. 1955년에야 4대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점령통치에서 벗어난 오스트리아한테는 ‘독일과 절대 합병하지 않는다’는 엄격한 조건이 부과됐다. 동시에 오스트리아는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이 될 것을 선언했다.

그때부터 많은 이들이 2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일부였다는 점은 잊은 채 ‘전쟁은 독일이 일으켰고 오스트리아는 무관하지 않는가’ 하고 여기게 됐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점을 들어 ‘오스트리아 역시 히틀러가 저지른 전쟁범죄의 피해자 아닌가’ 하는 인식까지 생겨났다. 오스트리아에서 나치 과거사 반성과 청산이 늦어진 이유다.

◆과거사 반성·청산 미흡… "이제부터 시작"

이처럼 오스트리아의 복잡한 역사는 쿠르트 발트하임(1918∼2007)이란 인물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는 23세이던 1941년 독일군 장교로 입대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였던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복무한 발트하임은 전후 독립한 오스트리아의 외교관이 됐다. 주(駐)캐나다 및 주유엔 대사와 외교부 장관 등을 거쳐 유엔 사무총장(1972∼1981)까지 지냈다.
쿠르트 발트하임 전 오스트리아 대통령. 사진은 유엔 사무총장 시절의 모습.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복무했던 그는 나치 일원이자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정황 등이 드러나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유엔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발트하임은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거 도전을 준비했다. 그런데 1985년 그가 독일군 복무 시절 나치와 관련됐으며 민간인 학살에도 가담한 정황이 드러났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셌으나 오스트리아 국민은 발트하임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직한 기간(1986∼1992) 오스트리아는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왕따’로 전락했다. 발트하임은 일국의 국가원수임에도 타국 정부로부터 ‘기피 인물’로 지목돼 입국금지 대상자 명단에 오르는 수모를 겪었다. 비록 발트하임은 대통령으로서 6년 임기를 채우고 물러났으나,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한동안 국제사회로부터 ‘홀로코스트와 과거사 반성·청산에 너무나 둔감하다’는 지적을 들어야 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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