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후일담의 시대’ 변절 않고 버틴 건 문학 덕이죠”
“중고등학교 시절 백일장 이후로 상이란 걸 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다른 문학상 같았으면 아마 거절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제가 김수영과 더불어 ‘사숙했다’고 해도 좋을 임화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이라 기꺼이 받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처음 표현하는 것인데, 제 문학은 임화가 숨을 거둔 처형대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학평론가 김명인 인하대 교수가 제14회 임화문학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985년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한 뒤 거의 40년 만에 받는 첫 문학상 수상이다. 내년 2월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는 그는 얼마 전에는 연구실에 있던 책 가운데 2천권 정도를 강화의 한 마을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2019년에 처음 대장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까지 마쳤다가 지난해 패혈증 치료 과정에서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되어 간 절제 수술을 하고 다시 항암 치료 중인 그를 지난 1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저는 임화의 시보다는 비평과 문학사가 놀라웠습니다. 매우 견고하고 세련되며 날카로운 논리 속에 한국문학의 근대적 기원을 냉철하게 정리해 낸 것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런가 하면 ‘현해탄’이나 ‘우리 오빠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 같은 그의 시들은 냉정한 리얼리스트이자 차가운 영혼을 가진 비평가·문학사가의 내면에 있는 혁명적 낭만주의자를 보여주었죠. 사실 제 문학의 출발도 시였고 80년대 초에 옥살이를 할 때까지도 시를 쓰다가 평론으로 방향을 바꾼 거라서, 제가 꿈꾸었던 낭만적 충동을 그가 시로 풀어낸 듯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도 됩니다.”
김명인 교수는 대학(서울대 국문과) 3학년이던 1979년 가을 교내 문학상에 “매우 예각적이며 절박한 긴장감을 담은” 시를 응모했다가 결선에서 떨어졌고, 그 직후 학내 시위와 관련해 붙잡혀 갔다가 10·26 사태를 맞아 보름 만에 석방되었다. 이듬해인 1980년 12월에는 이른바 ‘무림사건’ 주모자로 구속되어 형을 살고 1983년 8월에 출옥했다. 그때 당한 무지막지한 고문이 암세포로 바뀌어 지금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으로 그는 짐작한다. 출옥 뒤 무역회사를 거쳐 출판사에서 근무하며 평론가로 활동하던 그가 이름을 크게 알린 것은 1987년에 발표한 ‘지식인문학의 위기와 새로운 민족문학의 구상’을 통해서였다.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을 소시민적 지식인문학이라 비판하고 민중이 주체가 된 계급주의적 문학을 주창하며 80년대 말 민족문학논쟁을 이끈 이 글은 문학평론가로서 그의 출사표와도 같았다.
“그 글이 사실상 평론가로서 저의 출발이었어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만나서 폭발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죠. 그런 점에서 글쟁이로서는 매우 행복한 경험을 한 셈입니다. 사실 그 글은 마르크스주의적 문학의 한국적 번안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지금은 거의 폐기된 것이라 할 수도 있죠. 다만, 우리가 근대적 의미의 민족문학을 아직 건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글에서 주장했던 민족문학의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봅니다. 물론 당파성은 폐기되어야 하겠지만 말이죠.”
문학평론 40년 만에 첫 문학상 수상
“80년대 혁명의 수단으로 문학했다면
90년대 뒤 임화·김수영 삶 보며 버텨”
4년전 대장암 이후 두번째 암투병중
80년 ‘무림사건’ 고문 후유증 짐작
내년 정년 앞두고 회고록·토론모임
“최후까지 모색하며 제시하고 싶어”
출사표와도 같은 이 글이 남긴 그림자가 너무도 짙었기 때문일까.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국내 변혁운동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1990년대 초에 그는 평론을 중단하고 대학원으로 “도망”갔다. 임화와 더불어 그가 사숙했다고 표현하는 또 다른 문인 김수영을 자세히 읽기 시작한 게 그 무렵부터였다.
“김수영을 읽으면서 그 시기를 이겨낸 셈입니다. 김수영은 매우 고독한 사람이었죠. 혁명도 안 되고, 개인으로서도 부족하고, 시도 마음에 들지 않는, 그런 불만 상태에서도 끝까지 견뎌내고 자기를 세워서 결국은 어떤 시적 성취를 이루었어요. 굴욕과 위기를 견디는 견인, 정신의 치열성이라는 점에서 김수영은 제게 선생이었습니다. 87년 말의 좌절 이후 30여년을 제가 그래도 변절하거나 무뎌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임화적 상태에 대한 동경과 김수영적 자기 연단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김 교수는 “80년대에는 혁명의 수단으로서 문학을 했다면, 그 뒤에는 나의 실존을 정체되지 않도록 하는, 김수영적 의미에서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문학을 했다”고 말했다. “기나긴 후일담의 시대, 희망보다는 절망과 환멸이 더 컸던 시대, 우선 나 자신을 붙잡아 세워 놓는 것만 해도 힘든 시기를 버티는 버팀목 같은 것이 저에게는 문학이었던 거죠.”
정년퇴직 뒤에 그는 그동안 못 읽은 고전과 국내외 대하소설을 읽고 그것들을 현재의 문제와 접목해서 독서 일기 형식의 글을 쓰고 싶다고 밝혔다. 그와 함께, 가까운 이들과 부정기적인 독서 토론 모임도 마련하고 싶다고 했다. 당장은 무림사건을 중심으로 개인사를 돌이켜보는 회고록을 쓰는 중이다.
“정년이 되었다고 해도 낡은 지식인으로 남고 싶지는 않아요. 몸이 아파서 생산력이 떨어진다는 게 안타깝기는 하지만, 적어도 뒤처지지는 않겠다는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신자유주의와 기후위기 같은, 우리가 처한 난관에 대해 깨어 있으면서, 최후의 날이 올 때까지는 그래도 무언가를 모색하고 제시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어요.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 그들과 언제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벽이 없는 상태는 유지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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