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도 자신처럼 전쟁같이 훈련하길 원했던 조던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60‧198cm)은 농구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은퇴한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절대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과거는 물론 현재 진행형 레전드들에게도 넘지못할 큰벽으로서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NBA를 즐기는 이들은 현역은 물론 역대 전설까지 줄을 세워놓고 비교 평가하는 것을 즐긴다.
특히 역대 선수 랭킹같은 경우 선수, 전문가, 팬들에 따라 조금씩 의견이 갈리는데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역대 넘버 1, GOAT 자리는 일단 정해놓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곳에는 조던의 이름이 뿌리깊게 박혀 있고 2위부터 논쟁이 펼쳐진다. 이런저런 요소를 떠나 조던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선수 평가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 되는 것 중 하나는 커리어다. 정상권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은 하나같이 자신만의 임팩트가 확실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라 각자의 주관적 견해가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나마 상대를 설득해가면서 내 주장을 펼치기 가장 용이한 것이 커리어를 통한 비교다. 어느 정도의 기준점을 정해놓고 갑론을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압도적 레전드답게 조던 또한 깔끔한 커리어를 자랑한다. 전성기 시절 1차 은퇴 후 야구에 도전한 것을 비롯 아주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가져간 것은 아닌 관계로 누적 기록에서 엄청난 분량을 쌓아올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조던의 질은 어지간한 양을 압도한다.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소속팀 시카고에 6번의 파이널 우승을 안겼으며 그 과정에서 파이널 MVP(통산 6회, 역대 1위)를 독식했다.
‘큰 경기에 강한 선수가 진짜 승부사다’는 말처럼 조던은 플레이오프에서 유독 두드러진 모습을 보여줬다. 단일 파이널 필드 골 역대 1위(101골, 1993 파이널), 플레이오프 단일 경기 최다 득점(63득점), 통산 플레이오프 평균 득점 역대 1위(33.45득점), 통산 플레이오프 PER 역대 1위(28.76), 통산 플레이오프 WS/48 역대 1위(.2553) 등이 이를 입증한다.
그렇다고 정규시즌에서 약했던 것도 아니다. 정규시즌 MVP 5회, 득점왕 10회(역대 1위), 스틸왕 3회, 올해의 수비수상 1회, 올-NBA 퍼스트 팀 10회, 통산 정규 시즌 PER 역대 1위, 통산 WS/48 역대 1위 등 파도파도 괴물같은 기록 뿐이다. 기타 세부 기록으로 들어가도 상당수에 이름을 걸쳐놓은지라 팬들 사이에서는 '기록에 그분이 안나오면 서운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하지만 조던을 농구의 신, 아이콘 등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따로 있다. 다름아닌 ‘스토리’다. 단순히 커리어만 좋으면 ‘미친 듯이 농구를 잘한 선수’에 그칠 수도 있겠으나 특별하기 그지없는 스토리는 조던을 더욱 빛나게 해준다. ’킹’ 르브론 제임스(38‧206cm) 등 누적기록을 앞세워 커리어적인 부분에서 1위 자리를 위협하는 선수가 나오고 있음에도 팬들이 ‘아직 조던은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도 스토리 영향이 크다.
조던의 스토리는 흡사 잘 짜여진 영화 각본같다. 기승전결이 부드럽게 연결된 가운데 성장기, 고난기, 전성기, 다시 찾아온 고난, 마무리까지 완벽하다. 레이니 고등학교 농구부 시절 2학년때까지의 조던은 팀에서 전력 외로 취급받을만큼 눈에 잘 띄지않던 선수였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조던은 독하게 연습했고 그런가운데 키까지 쑥쑥 자라며 단숨에 팀 에이스는 물론 전국에서도 주목하는 유망주로 스스로의 가치를 끌어올린다. 4학년 시절에는 전력이 강하지 않았던 모교를 노스캐롤라이나 주 랭킹 1위까지 이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더더욱 실력이 상승한다.
신입생 시절 패트릭 유잉이 뛰고 있던 조지타운대를 상대로 한 NCAA 파이널에서 결승 점프 슛을 터트려 일거에 전국구급 스타로 떠오른다. 1984년 NBA 드래프트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 시카고 불스의 운명을 바꿔놓은 운명의 순간으로도 유명하다. 휴스턴 로키츠가 1순위로 ‘흑표범’ 하킴 올라주원을 뽑은 가운데 포틀랜드는 그 다음 넘버2 센터로 평가받았던 샘 보위를 지명한다.
조던을 지명해야 된다는 얘기도 꾸준히 나왔지만 당시 팀에 ‘글라이더’ 클라이드 드렉슬러라는 정상급 슈팅가드가 있었기에 다른 포지션을 선택했다. 익히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는 NBA 역사상 가장 바보같은 결정으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보위는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나름 자신의 몫을 해냈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조던이었던지라 억울할 정도로 두고두고 이름이 거론되는 모습이다.
더불어 슈팅가드라는 포지션도 조던의 드래프트 당시 기대치를 떨어뜨린 이유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특급 선수들이 드래프트에 나오면 빅맨 포지션이 더 선호받는다. 당시에는 더 심했다. 더욱이 매직 존슨같은 엄청난 사이즈의 포인트가드도 아니고 스윙맨 스타일의 2번 선수를 빅센터 유망주들을 제치고 뽑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데이터 역시 이를 입증한다. 당시 NBA 역사는 40년에 가까웠는데 모든 포지션을 포함해서 유일하게 슈팅 가드에서만 MVP가 배출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 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지명됐다는 것은 오히려 조던의 위엄을 입증한다. 이후 조던은 리그를 지배해가며 슈팅가드, 스윙맨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꿔버린다.
시카고에 입단한 조던은 당시까지 별볼일없던 팀을 리그를 대표하는 명문으로 만들어낸다. 실질적인 조던 서사시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다. 통산 10회 득점왕 타이틀이 말해주듯 조던의 최대 장점은 꾸준함과 폭발력을 겸비한 득점능력이었다. 하지만 조던은 혼자만 빛나는 것을 원하지않았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팀이 강해져야만이 경기에서 이기고 더 나아가 꿈에 그리던 파이널 우승까지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던은 전형적인 득점머신이자 에이스다. 선배 레전드들인 매직 존슨, 래리 버드처럼 패싱게임이나 팀플레이를 통해 동료들을 살려주는 플레이는 약할 수 밖에 없다.
조던은 답을 다른데서 찾았다. 그가 특급 선수로 성장했던 이유로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미친듯한 승부근성을 앞세운 전투적인 훈련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다. 당연히 재능도 빼어났겠지만 훈련에 임하는 자세나 마음가짐부터 남달랐다. 팀내에서 영향력을 가지게된 시점부터 조던은 동료들 또한 자신같이 훈련하기를 바랬다.
혹자는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고 코비 브라이언트같은 타고난 독종이라면 모를까 팀 전체가 조던처럼 훈련에 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물론 조던도 이를 몰랐을리 없다. 자신만큼은 힘들겠지만 어느 정도 선을 만들어놓고 무조건 거기까지는 도달하기를 바랬다.
때문에 당시 시카고의 훈련장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했으며 이를 주도하던 조던은 그야말로 ‘대악마’였다고 알려져 있다. 독선적인 방식에 반발하던 식스맨 스티브 커(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감독)와 주먹다짐을 벌였던 것이 대표적 예다. 조던 외에 특급으로 꼽힐만한 유망주가 없었음에도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팀이 된 이유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1984제공, FIBA 제공
Copyright © 점프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