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 교실에 낭랑한 “난 초콜릿 좋아해”…설레는 새 학기
하르키우 당국, 학생 1천여명 등록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도 어김없이 새 학기가 찾아왔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신입생은 이른 아침부터 ‘지하철역 교실’로 향했다. 이곳엔 하늘이 보이는 창은 없지만 러시아군의 공습에도 안전하다.
“내 이름은 나스티야. 초콜릿을 좋아해요.” “나는 블라드입니다. 스포츠와 게임을 좋아합니다.” 우크라이나 전통 자수가 새겨진 비쉬반카를 갖춰 입은 신입생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했다. 우크라이나는 9월부터 학기가 시작된다. 교실 안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실 밖으로는 지하철을 타려는 통근자들이 이따금 지나갔다. 지하철 역 안이지만 여느 초등학교의 입학 첫날과 다름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5일(현지시각) 러시아와의 국경에서 불과 40km 떨어진 북동부 하르키우의 새 학기 풍경을 전했다. 지난해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558일째 되는 날이었다. 교육 당국은 계속되는 러시아의 공습 위협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도시의 거대한 지하철역 곳곳에 임시 교실을 마련했다. 사방은 어둡고 차가운 돌벽이었지만 1학년생들 눈을 사로잡을 만한 오색빛깔 그림과 스티커가 나붙었다. 한쪽 벽에는 커다란 글씨가 적혔다. “깨부술 수 없는 하르키우.”
유니세프에 따르면, 전쟁 발발 뒤 우크라이나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의 학교 1300곳 이상이 파괴됐다. 안전한 교육 환경이 사라진 뒤 우크라이나 아이들은 심각한 학습 결손을 겪고 있다. 러시아의 미사일 발사와 그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하르키우에서는 온라인 수업이 일상화된 지 오래다. 하지만, 언제까지 화상으로만 친구와 선생님을 만날 순 없다. 하르키우 교육 당국은 물리적인 교실에서 공부하길 원하는 학부모, 학생을 위한 프로젝트를 자발적으로 마련했다. 컴퓨터 기반 학습을 보완하는 동시에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도 될 수 있는 그런 교실을 마련한 것이다.
개학 첫날 등교하는 아이의 모습을 감격스레 바라보며 스마트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댄 부모, 그리고 교사들은 지하철 교실 프로젝트를 환영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군이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라도 아이들이 보통의 교육을 받고 또래와 상호작용을 할 기회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하르키우 시 당국에 따르면, 현재까지 학생 약 1천명이 등록을 마친 상태다. 하르키우 전역에 있는 학생 수 약 11만2천명에 비하면 1%가 채 되지 않는 규모다. 하지만 차츰 더 늘어날 것으로 시 당국은 내다보고 있다. 전국 여론조사를 보면 약 20%에 달하는 부모들이 아이가 교실에서 공부하길 원한다.
지하철역 학교에는 화장실과 환풍 시설이 마련돼 있다. 복도 뒤쪽에는 간호 인력이 대기한다. 혹시라도 무릎이 까지거나 콧물이 나는 학생들을 돕기 위해서다. 심리학자들도 조용히 아이들을 관찰한다. 하르키우에는 최전선 지역에서 피란 온 가족들이 많다. 1년9개월째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아이들은 더 큰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온라인보다는 훨씬 나아요.” 지하철 학교에 7살짜리 딸 소냐를 보낸 엄마 보다나는 수업을 곧 마치고 나올 아이를 기다리다 이렇게 말했다. 소냐네 가족은 지난해 폴란드와 가까운 서부 국경도시 르비우로 피란을 떠났다. 우크라이나군이 하르키우 지역을 재탈환한 뒤인 지난해 가을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쟁과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는 중이다. 엄마에게는 진짜 학교 건물이든, 지하철 학교든 딸을 교실로 데려다주는 게 중요하다. “소냐가 다른 아이들이랑 대화할 수 있으니까요.”
‘위이이이잉.’ 이날 아이들이 생애 첫 학교 수업을 마친 뒤 지하철 밖으로 올라오자 밑에선 들리지 않던 공습 경보 소리가 그들을 맞았다. 매일같이 온 도시에 울려 퍼져 일상이 돼 버린 소리다.
베를린/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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