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의 탄환은 아직 탄착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정의길의 세계, 그리고]

정의길 2023. 9. 6. 16:2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윤 정부 ‘역사 쿠데타’]

1998년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국방부는 지난달 28일 육사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에 있는 이 흉상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이후 다시 국방부 청사 흉상은 이전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백년 전 홍범도가 발사한 탄환은 아직 탄착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탄환이 탄착점에 명중하기까지, 우리도 그가 겪었던 능욕과 풍상을 겪어야 한다. 그 탄환이 두려운 이들의 독립군 흉상 철거, 이 소동의 동력인 국제 정세에서 촉발된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이 야기한 한반도의 폭풍우가 그것이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독립군 흉상 토벌 작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소식이 전해졌다. 한반도에서 대화와 협상이 증발했다. 몰아칠 대결과 갈등의 폭풍에 아득할 뿐이다.

윤석열 정부가 일제 황군에 쫓겨 소련 영내로 넘어간 홍범도 장군을, ‘빨치산’ ‘공산당’이라며 그 흉상을 육사에서 철거하려 한다. 국군은 그 뿌리가 백선엽 같은 일본 황군이어서, 그들이 가담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이어서 완수하려는 수작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기도 미묘하다. 지난 8월18일 한·미·일이 미국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에서 정상회의를 하고, 세 나라의 삼각 동맹 체제로 가는 길을 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금기시되던 한국과 일본의 군사협력, 군사동맹 체제로 가는 문을 열었다.

일제와 싸우던 독립군들이 국군의 군문에서 버티고 있자, 향후 원활한 한-일 군사 관계에 장애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홍범도 대신 백선엽 동상을 군문에 세우겠다 하고, 그의 친일 부역 기록도 이미 지웠다.

때맞춰 김정은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하고는 두 나라의 군사협력을 다지려 한다. 한세기 전 만주의 독립군은 일제의 토벌에 쫓기며 중국 본토나 소련 연해주로 넘어갔다. 이제 김정은은 북한을 옥죄는 한·미·일 협력 체제에 맞서기 위해 연해주를 찾는다.

당시 독립군은 일제의 토벌에 울분과 낙담 속에서 쫓겨갔는데, 김정은은 한·미·일 삼각 협력 체제나 한·일 군사협력에 활짝 웃으며 연해주를 찾을 것이다. 독립군들은 중국이나 소련에 의탁하려고 갔는데, 김정은은 한·미·일 체제에 맞설 자신의 몫을 러시아와 중국에 과시하러 갈 것이다.

북한은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국제사회에서 왕따당한 천애 고아처럼 지냈다. 이제 중·러의 든든한 동반자로 나서게 됐다. 30년 전 소련은 망했고, 중국은 미국과 손을 잡았다. 그래서 중국과 러시아는 한국과 수교했으나 북한은 미·일과 수교를 못 하고 배척당했다.

북한은 핵 개발을 선택해 미·일과 협상하고 수교해 고립을 타개하려고 했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때까지 북한의 길이었다. 하노이 회담이 노 딜로 끝나자, 김정은의 북한 체제는 미·일과의 협상을 포기했다. 유일한 자구책으로서 ‘핵무력의 고도화’로 질주했다.

그 이후 미-중 대결이 본격화돼 미국의 대중국 디커플링과 인도·태평양 전략이 강화됐다. 그 와중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동병상련의 중국과 러시아는 ‘양국 우호에는 제한이 없다’는 역사적인 우호 관계를 맺으며 서방과 분리되는 독자적인 생태계 구축에 나섰다. 중·러는 지난 30년간 핵 개발 중단을 종용하며 지원을 끊었던 북한을 다시 자기들 진영의 일원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중·러의 구애에 김정은의 북한은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미·일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핵무력 고도화로 질주해온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1960~70년대 중-소 분쟁 와중에 중·소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쳤던 경험이 있던 북한에 현재 중·러의 역사적인 연대와 자신에 대한 구애는 그 어느 때보다 우호적인 환경이다.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과 관련해 한·미가 비난하는 양국의 무기 거래는 아마 북·러에는 부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들은 더 큰 전략적 그림을 그릴 것이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북한과의 연합훈련에 대해 “왜 안 되겠는가, 우리는 이웃이다”라고 답했다. 중·러는 이미 동해와 서해에서 연합훈련이 이뤄지고 있다. 북한의 참여는 시간문제이고, 중·러는 동북아에서 북한의 전략적 역할을 기대한다.

2차대전 이후 동북아에서는 항상 한·미·일 남방 동맹 대 북·중·러 북방 연대 세력의 대결 가능성이 상존해왔다. 하지만 한·미·일 동맹은 한-일 관계에, 북·중·러 연대는 중-러 관계에 막혀왔다. 이제 그 매듭이 풀리고 있다.

홍범도 일대기 ‘범도’의 작가 방현석은 “백년 전 홍범도가 발사한 마지막 한 발의 탄환은 아직 탄착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 반드시 표적의 정중앙을 관통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탄환이 탄착점에 명중하기까지, 우리도 그가 겪었던 능욕과 풍상을 겪어야 하는 모양이다. 그 탄환의 명중을 방해하려는 이들의 독립군 흉상 철거, 이 소동의 동력인 국제 정세에서 촉발된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이 야기할 한반도와 그 주변의 폭풍우가 그것이다.

Egil@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