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돛단배의 시대가 돌아왔다 [지구, 뭐래?]
[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세 개의 돛대에 나부끼는 흰색 돛. 전형적인 외형을 가진 이 돛단배 ‘베가(Vega)’는 1909년 스웨덴에서 건조됐다. 이후 1967년까지 약 58년간 화물선으로써 임무를 완수하고 퇴역했다.
그러나 지난해 5월께 갑작스레 새 주인을 만났다. 단장을 마치고 지난해 말부터 중남미 국가 콜롬비아와 미국 뉴저지주 사이에서 커피 원두를 나르고 있다.
이처럼 바람에서 추진력을 얻는 범선, 이른바 돛단배가 바다로 돌아오고 있다. 바람에 날리는 ‘흰 천’부터 비행기 날개처럼 크고 무거운 금속까지 돛의 재질은 각기 다르지만 등장한 이유는 비슷하다.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연료를 향한 해운업계의 요구가 커지면서 전통의 동력원인 바람을 다시 찾게 된 것이다.
113년 된 늙은 배를 다시 현역으로 불러들인 건 코스타리카의 스타트업 ‘세일카고(Sailcargo)’다. 무공해 선박 제작을 표방하며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는 회사다.
베가의 경우 돛, 즉 풍력 외에 다른 동력 장치가 전혀 없다. 당연히 온실가스 배출량 역시 0이다. 베가는 적재량 82t 가량에 선원 14명, 승객 4명이 탈 수 있는 중형 크기의 배다. 사실 공정 무역 커피를 싣는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작고 느리더라도 무공해 운항을 하는 측면도 크다.
바람과 함께 수소연료전지, 바이오 연료 등을 활용해 무공해 선박을 계속 만들어가겠다는 게 세일카고의 목표다. 현재 제작 중인 또다른 돛단배 ‘세이바’는 전기모터를 달아 바람이 약해졌을 때도 운항할 수 있도록 했다. 전기도 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배에 태양광 패널도 설치할 예정이다.
이처럼 해운업계에서 돛과 같은 과거의 동력원까지 기웃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온실가스 저감의 압박이 거세기 때문이다. 지난 7월 국제해사기구(IMO)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로 했다.
당초 2050년까지 2008년 온실가스 배출량의 50%를 감축하겠다는 게 IMO의 목표였는데 더 강화됐다. 2008년과 비교해 2030년에는 20%, 2040년엔 70%를 줄이겠다는 중간 목표도 구체화했다. 해마다 약 8억3700만t씩 줄여나가야 하는 셈이다. 현재 해운업계에서 배출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은 연 10억t 가량으로 전세계 배출량의 3% 수준이다.
온실가스를 줄이려면 현재 대부분의 선박은 중유나 액화천연가스(LNG) 등 화석연료를 동력으로 한다. 수소나 암모니아, 메탄올 등 대체 연료 추진 선박을 개발하고 있으나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은 데다, 실제 선박에 적용하기 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런 탓에 별다른 기술 개발 없이 즉각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동력원인 바람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친환경 연료로 넘어가기 이전에 효율을 높여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방식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지난달 말에는 높이 37.5m의 강철로 된 돛을 2개 단 화물선 ‘픽시스 오션(Pyxis Ocean)’이 장거리 항해를 시작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곡물 기업 카길(Cargill)의 배로 중국에서 브라질까지 6주 간 운항 중이다. 실제 생김새도 돛보다는 풍력발전기 터빈에 가까워 윈드 윙스(Wind Wings)라고 부른다.
이 강철 돛을 달면 최대 30%까지 연료를 절감할 수 있다는 게 제조사 바 테크놀로지의 설명이다. 돛 하나 당 연료를 1일 1.5t씩 줄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선박 1t당 연료 비용으로 약 78만원이 줄어들고, 하루에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5t 가량 줄어들게 된다.
이를 시작으로 바 테크놀로지는 이달에는 강철 돛을 4개 단 선박을 중국 상하이에서 또 출항시키는 등 향후 수백 개를 제작할 예정이다. 존 쿠퍼 바테크놀로지스 대표는 “이번 항해가 해운산업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addressh@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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