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투쟁’ 사관생도 32명 러시아행…학교 지키려 벌목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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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은 19살 되던 해에 나자구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의병 투쟁을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 사관학교를 조선인들은 대전학교라고도 불렀다.
1915년 12월 혹은 이듬해 3월에 결국 나자구 사관학교는 폐쇄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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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학교 폐쇄 위기에 생도들 스스로 자금 마련
독립운동 지탱하는 근간으로 성장…1명은 숨져
조훈은 19살 되던 해에 나자구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의 전후 사정을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상하이에서 나는 미국으로 밀입국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간도로 갔다. (…) 그 후 의병 투쟁을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자금 결핍 때문에 학교는 단지 11개월 동안만 존속할 수 있었다. 1915년 말이었다.”1
■ 의병 투쟁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
평양의 기독교계 중등학교에서 수학하던 조훈은 식민지 조선의 교육 환경에 울분을 품고서 미국행을 꿈꿨다고 한다. 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리라. 평안남북도의 기독교 청년 가운데 미국 유학을 떠나는 사람이 꽤 있었다. 조훈이 중국 상하이로 간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세 명의 학우가 행동을 같이했다. 그러나 장벽이 높았다. 태평양을 건너는 뱃삯도 문제려니와 출입국 서류를 마련하는 일이 큰 난제였다. 식민지 조선인이 미국으로 건너가려면 일본 정부가 발급하는 여권과 출국 서류, 미국 정부가 발급하는 입국비자가 있어야 했다. 선교사들의 후원을 받지 않고서는 출입국 서류를 떼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밀입국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상하이는 미국, 영국, 프랑스 조계지가 자리잡은 대도시이자 동아시아와 유럽·북미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곳에만 가면 어떻게든 길이 열릴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미국 밀입국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진로를 변경해야 했다. 고심 끝에 조훈이 선택한 곳은 북간도였다. 두만강 국경 너머 조선인 이주민이 수십만 명 거주하는, 그곳으로 나아갔다. ‘의병 투쟁을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나자구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길이었다.
중국 길림성 왕청현 나자구에 있는 이 학교의 정식 명칭은 ‘왕청현 제1고등국민학교’였다. 중국 교육법상 정규 중등교육기관의 하나로서 지방정부 길림 동남로 행정 당국의 승인을 받아서 개설된 학교였다. 설립 당시 지방정부 수반으로부터 3천원의 특별지원금까지 받을 정도로 합법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중국인이었다.
■ 사관생도 20살부터 30살까지…평균 24.4살
사관생도 전체는 아니지만 그중 45%에 이르는 54명의 이름과 나이를 확인할 수 있다.2 최연소자는 20살이고, 연장자는 30살이었다. 오늘날 대학교 1~3학년에 해당하는 20~22살 주니어층이 15명이고, 대학교 4학년에서 석사과정에 해당하는 23~25살 중간층이 22명이었다. 대학원 박사과정생에 해당하는 28~30살 시니어층이 13명이었다. 평균 24.4살이었다.
나자구라는 지명은 일명 대전자라고도 불렸다. 그래서 이 사관학교를 조선인들은 대전학교라고도 불렀다. 자료에 따라서는 동림무관학교라는 호칭도 쓰였다. 나자구 사관학교를 포함한 이 명칭들은 모두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조선인들끼리 은밀하게 부르는 이름이었다.
사관학교를 유지하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교육을 맡은 교수들이 보수를 받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설립 과정에서 토지와 건물은 장만했지만, 생도들의 의복과 식비를 다달이 마련해야 했다.
일본 관헌의 첩보에 따르면 매달 700루블의 경비가 필요했다. 학교 당국은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머지않아 재정난에 빠져들었다.
1915년 12월 혹은 이듬해 3월에 결국 나자구 사관학교는 폐쇄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일본 영사관 쪽 방해 공작도 영향을 끼쳤지만 주로 자금난 때문이었다. 사관생도들은 독립군 장교 양성 사업이 중단되는 것을 차마 지켜만 볼 수 없었다. 조훈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3. 四方子, ‘北墾島 그 過去와 現在’, <독립신문>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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