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구호뿐이었나…33년 만의 과학 예산 삭감
미래 위한 기초연구 생태계 무너질 수도
[왜냐면] 최기영 |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명예교수·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지난 8월 말 정부가 발표한 예산안을 보면, 내년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25조9천억원으로 올해 대비 16% 넘게 줄었다. 1조8천억원의 교육 및 기타 부문 연구개발 예산을 일반 재정사업으로 재분류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10% 넘게 감소한 것이며, 내년도 전체 정부예산이 2.8% 증가한 것을 생각하면 더 많이 감소한 셈이다. 국가 연구개발 예산안이 전년도보다 감소한 것은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이고, 그 감소율도 매우 높다. 정부 총지출 대비 연구개발투자 비중의 추이를 보면 지난 10년간 꾸준하게 5% 내외를 유지하다가 내년 예산안에서 3.9%로 급격하게 떨어진다.
더욱 심각한 것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1년 가까이 힘들게 마련한 예산안을 갑자기 삭감하라는 바람에 두 달 만에 수정했으니 졸속 예산안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삭감의 이유가 나눠먹기식 연구개발 카르텔 때문이라니 연구현장에서 땀 흘려가며 일하는 연구자들에게는 기막히고 의욕을 상실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로서는 어떤 것이 카르텔 사업인지 특정지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많은 연구과제 중 극히 일부에 문제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우를 범하면 안 될 것이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만 고치면 된다. 성실하게 연구에 정진하는 연구자들이 연구비 삭감을 걱정하고, 법을 걱정하고, 수사를 걱정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연구성과가 하위 20%인 과제는 퇴출시킨다고 하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성과를 판단할 것인지도 걱정되는 부분이다. 특히 급하게 안을 마련하면서 과제 성격을 따지지 않고 단기간에 달성할 수 있는 경제적 성과를 기준으로 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기초연구의 경우 기간과 경제성을 따지지 않고 연구자들이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는 그저 그것이 할만한 연구인지 전문가의 의견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정도에 그치고 더 이상 간섭은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그동안 학계, 연구계, 정부가 협력해서 기초연구 예산을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증가시키면서 그런 바람직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다. 이제 연구비가 대폭 줄어들면서 우리나라의 기초연구 환경이 다시 무너지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가뜩이나 부족한 연구비를 잘라내어 외국 연구자나 연구기관의 연구를 지원하겠다는 것도 걱정된다. 기본적으로 외국과의 공동연구를 활성화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이를 단기간에 졸속으로 추진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까지는 국제 공동연구를 하게 되면 상대국도 매칭 펀드를 지원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새로운 형태의 국제 공동연구 과제를 급하게 추진하면 상대국 매칭 펀드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고, 결국 일방적으로 우리나라만 연구개발 예산을 지원하게 될 텐데, 이야말로 외국에 퍼주는 결과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일례로 공동연구 산물인 지적재산권은 어떻게 할 것인지 살펴보자. 연구비는 우리나라가 지원하니 외국에서의 연구로 발생한 지적재산권이라고 해도 그 나라에 모두 넘겨줄 수는 없을 것이다. 공동소유로 한다면 실시권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등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모든 권리를 소유한다면 우수한 외국 연구자가 참여하지 않는다. 국민 혈세를 낭비하지 않으려면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규정과 절차를 마련한 뒤에야 시도할 일이다.
경제가 어려울 때는 민간의 연구개발비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그럴 때일수록 연구자가 연구계를 떠나지 않게 국가가 연구개발에 재정을 더 많이 투입해서 어려움에 처한 연구자들을 보호해야 하는데, 오히려 연구개발 예산을 감축하면 하던 연구가 중단되고 연구자는 사라지게 된다.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는 성과가 나올 때까지 수년 이상 걸리고, 좋은 연구자를 양성하는 것은 더 오래 걸린다. 나아가 예산 삭감의 영향이 특정 연구에 그치지 않고 해당 분야로 크게 확대되면 그 분야에서 진행되던 연구는 물론, 연구 집단과 연구 생태계가 무너지게 된다. 우리나라가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이미 겪었던 일인데, 그 악몽이 다시 재현되는 것 같아 매우 우려스럽다.
현 정부는 출범할 때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외쳤고, 과학방역을 강조했으며, 요즈음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과학을 끌어들여 안전성 주장의 방패로 삼고 있다. 그러나 정작 국가 과학기술의 발전과 연구자의 보호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한 것 아닌지 다시 돌아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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