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보다 넉넉하고 국밥 보다 진한 '오대산 노인봉' 하루 여행
"야 어디어디로 몇 시까지 모여" 한 마디면 충분했다. 잇속 따지는 사람 하나 없고 배려와 준비의 마음이 가득한 사람들이 그렇게 뭉쳐 세상을 떠돈 이력이 내공으로 쌓이는 건 당연한 일. 오대산 노인봉도 그렇게 다녀왔다. '새벽 5시20분 서울 모처에서 봅시다.' 사정이 있는 사람은 다음 기회에 보면 그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이는 거다. 일행 모두 아침을 못 먹어서, 가는 길에 아침을 먹기로 하고 출발. 곤지암 국밥집 중 '골목집'을 선택, '국밥' 한 뚝배기로 든든하게 아침을 먹었다. 오대산 노인봉 산행 출발지점인 진고개정상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30분이었다.
●왜 진고개정상휴게소인가
진고개정상휴게소에서 노인봉까지 4.1km다. 진고개정상휴게소 차를 세우고 왕복 8.2km 산길을 걷는 거다. 노인봉을 오르는 정식 등산로 중 가장 가까운 거리라고 알려졌다.
진고개 정상은 해발 960m다. 태백산맥을 동서로 넘는 주요 고개 중 하나다. 평창군 대관령면과 강릉시 연곡면을 연결하는 고갯길이다. 등산로가 연곡면과 대관령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어진다.
비가 오면 땅이 질어진다고 진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와 고개가 길어서 긴 고개라고 한 것이 세월이 지나며 진고개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개인적으로는 고개가 길어서 긴고개라 부르다 자연스레 진고개가 됐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쏠린다.
진고개정상휴게소에서 노인봉으로 가는 길 입구에 아치형 문이 있다. 그 문을 통과하면서 등산은 시작된다.
진고개 주변 지형은 해발이 900~1000m임에도 평탄한 지형이 넓게 펼쳐졌다. 신생대 제3기 말부터 한반도는 수평 횡압력에 의한 동해의 해저지각 확장으로 인해 융기했는데, 이때 융기축이 동쪽에 더 많이 치우쳐 동쪽은 높이 솟아 급경사를 이루고 서쪽은 완경사를 이루었다는 안내판의 설명을 읽고 발걸음을 뗐다.
진고개정상휴게소에서 산에서 먹을 물과 간식꺼리를 넉넉하게 샀더니 등짐이 좀 무겁다. 산행의 맛 중 하나가 쉬면서 즐기는 간식이니, 행복한 무게다.
●보고 있으면 걷고 싶어지는 고원평전
얼마 지나지 않아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900~1000m 고도에 평탄한 지형을 이루었다는 안내판 설명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고원평전'이다.
너른 들판은 온통 초록이었다. 가슴 뻥 뚫리고 눈이 맑아진다.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 낯설었다. '낯섬'은 새로움이다. 새로운 풍경 앞에서 마음도 처음처럼 신선해진다. 그게 여행의 매력 중 하나다.
멀리 숲과 평원의 경계지점이 보이고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까지 구불거리는 오솔길이 이어졌다. 그 길을 걷는 일행을 멀리서 본다. 개미처럼 작아지는 일행의 모습이 초록의 들판과 하나 된다.
초록 들판 한쪽에 난 구불거리는 오솔길은 그 자체로 평온이다. 일행의 뒤를 따랐다. 아주 천천히 풍경을 마음에 새기며 걸었다. 일행과의 거리가 그대로 유지되는 걸 보니 그들이 걷는 속도도 나와 같았을 것이다. 그들도 이 풍경을 마음에 새기며 걸었을 것이다.
●화강암 바위 봉우리, 노인봉 정상에 눌러앉다
고원평전을 뒤로 하고 숲으로 들어갔다. 특별할 것 없는 숲길이었다. 데크로 만든 계단도 오르고 흙길도 걷는다. 땀으로 온몸이 젖었다.
일행 중 누군가 걸음이 느려지며 '헉, 헉' 대기 시작했다. 가파른 계단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고원평전을 지날 때부터 산에 안 다닌 지 꽤 돼서 힘들 것 같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일행은 모두 그 자리에서 쉬기로 했다. 휴게소에서 산 물과 음료, 간식을 먹으며 충분히 쉬었다가 다시 출발했다.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의 속도에 맞춰 걷는 것이다. 산 잘 타는 사람도 몸이 가벼운 사람도 누구 하나 먼저 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고 그의 곁에서 쉬었다. 그는 먼저 가라고 했지만 함께 쉬었다. 그리고 함께 걸었다. 그렇게 사오십 분 쯤 걸었을 때부터 힘들어하는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아마도 그때 숨이 트인 것 같다. 몸이 산에 적응하는 것이다.
평범한 숲길이 계속 이어졌다. 시야가 조금씩 터지는 곳도 있었지만 숲길에서는 산 밖이 시원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보이는 숲길 옆 바위지대로 조금 올라가니 시야가 터졌다. 전망에 감탄한 목소리에 일행 모두 그곳에 올라 전망을 즐기고 다시 내려서서 걷기 시작했다. 다시 숲길을 걸어 우리는 오대산 노인봉 정상 아래 도착했고, 가파른 바위 봉우리를 기어올라 1338m 노인봉 정상에 섰다.
노인봉을 이룬 화강암 바위들이 기묘하게 생겼다. 허연 화강암 바위가 쌓인 노인봉을 멀리서 보면 백발의 노인 같다고 해서 노인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노인봉 남쪽으로 황병산이 보인다. 1407m의 황병산 왼쪽에 1328m의 소황병산, 1173m의 매봉이 이어진다. 멀리 동해바다까지 보인다. 바닷가에 보이는 사람 사는 마을은 주문진이다.
일행은 노인봉 정상에서 한참 머물렀다. 시야가 사방으로 통쾌하게 터졌다. 끊이지 않고 부는 바람을 즐긴다. 화강암 바위들이 쌓인 노인봉이 햇볕에 반짝인다. 허연 화강암이 백발 노인의 모습 같아 노인봉이라 했다지만, 이렇게 반짝이는 노인봉은 젊었다. 누구 하나 먼저 내려가지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대산을 비벼먹다
정상에 부는 바람 소리에 적막은 더 깊어졌다. 일행 중 누군가 일어서서 말없이 바위 봉우리를 조심조심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랐다.
하산 길에 만난 이정표 앞에서 의견을 모아야 했다. 소금강으로 내려가는 길과 올라온 진고개정상휴게소로 내려가는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소금강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낙영폭포, 광폭포, 심폭포, 선녀탕, 백운대, 만물상, 구룡폭포, 세심폭포, 금강사 등을 볼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유혹했지만 문제는 타고 온 차가 진고개정상휴게소에 있다는 것이었다. 소금강으로 내려가서 택시를 타고 다시 진고개정상휴게소로 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배가 고팠다.
출발했던 곳으로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하산길에 누군가 다리에 쥐가 나기도 하고 새로 산 등산화에 발뒤꿈치가 까지기도 했지만 얼굴은 오대산 공기처럼 해맑게 빛났다.
진고개정상휴게소에서 일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강릉 쪽으로 차를 달렸다. 도로 옆에 송천휴게소 식당 간판이 보였다. 맛집을 찾아 어디를 더 가기에는 배가 너무 고파 그냥 들어갔다. 뜸들이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는 산채비빔밥이 눈에 들어왔다.
우연히 찾아간 식당에서 만난 뜻밖의 맛은 이른바 '특종'이었다. 밥 더 주세요, 반찬 더 주세요, 라는 주문은 몇 번이고 이어졌다. 배고픈 지 꽤 되기도 했지만, 오대산 기슭의 수수한 풍경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산채비빔밥 맛이 좋았다. 더구나 이렇게 좋은 사람들끼리 함께 땀 흘리며 걷고 웃고 떠드는 하루이니... 아침에 먹은 국밥 보다 진하고, 지금 먹는 산채비빔밥 보다 넉넉한 그들과 함께이니...
글·사진 장태동 트래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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