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목포의 시간 속으로
(시사저널=글 옥송이·사진 신규철)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 위에 새로운 오늘을 펼친다. 세월을 간직한 도시, 전남 목포를 걷는다.
기차가 마지막 역인 전남 목포역에 도착한다. 이른 아침 길을 나선 까닭은 목포의 화려한 시절을 상상해 보고 싶어서다. 목적지는 1897개항문화거리다. 근대에 형성된 거리와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부르는 곳이다. 근대도시의 막을 올린 1897년과 대중음악이 성행한 1935년의 목포를 걸어 볼 작정이다.
자주 개항 도시
타임머신 없이도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닿고자 하는 시간대를 머릿속에 입력하고 특정 장소에 이르면 되니까. 박공지붕을 인 공장, 나직한 단색 건물이 정감 가는 1897개항문화거리를 걷다가 '목포미식문화갤러리 해관1897'을 여정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1897이라는 숫자와 해관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해관은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과 유통 물품에 세금을 부과하고 수출입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목포해관은 1897년 목포의 개항과 동시에 업무를 시작했다. 이후 1907년 세관으로 명칭을 바꾼 뒤 이듬해 목포진에서 이 자리로 옮겨 왔다. 목포미식문화갤러리 해관1897은 구 목포세관의 창고 두 동을 각각 세관 역사관, 미식 문화 공간으로 개조했다.
한편에는 구 목포세관 본관 터가 자리한다. 건물 형체는 사라지고 없다. 다만 벽돌이 도면처럼 남았다. 직사각형으로 열을 지은 벽돌이 구획을 나눈다. 크고 작은 사각형을 바라보며 각 공간의 쓰임새를 유추한다. 붉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치장한 건물 내부는 응접실, 대기 장소, 사무실, 은행원실, 비서실, 관장실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사람 대신 풀만 자란다.
본관 터 뒤로 창고가 보인다. 세관은 수송 화물을 보관·선별하거나 통관 절차를 완료하기까지 수출입품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가 필요하다. 이곳에 자리했던 다양한 창고 건물은 6・25전쟁 기간 모두 소실했고, 남은 두 창고는 1955년 준공했다. 세관 역사관으로 쓰이는 작은 창고로 발걸음을 옮긴다.
목포는 부산·원산·인천에 이은 네 번째 개항지다. 이전의 개항과 다른 점은 자주 개항지라는 점이다. 목포항은 고종 칙령으로 문을 열었다. 일본과 협의하지 않고 선포로 사실을 알렸다. 1897년 10월 1일, 목포항과 해관을 같은 날 개시할 수 있었던 건 해관 입지 조건 조사 등 사전에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같은 달 12일, 조선의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변경됐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목포는 대한제국의 꿈이 담긴 국제무역항이었다. 해관을 통해 선박 조사와 관리는 물론, 관세를 부과해 정부 수입원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강제 개항과 자주 개항의 차이점은 거류지에서 명확해진다. 거류지는 항구 내 마련된 외국인 거주 지역을 뜻한다. 앞서 개항한 항구들은 일본과 청국에 전관거류지를 내줬다. 각 나라의 거류지를 마련해 준 것이다. 자주 개항지인 목포항은 일본의 단독 거류지 요구를 거절한다. 대신 모든 외국인이 한 지역에서 공동으로 머무는 각국 거류지를 도입한다.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특성을 악용해 한국 해안을 측량하거나 군사적 의도로 활용할 우려가 있는 전관거류지의 문제점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거류지였던 만호동 일대의 바둑판식 거리와 상가 건물, 시가지는 이때 생겨났다.
이제 미식 문화 공간인 큰 창고를 둘러본다. 주로 요리 강습, 디저트 페어 등 행사에 사용한다. 창고 한쪽은 지역자활센터가 입점해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목포 시목인 비파나무로 만든 음료가 대표 메뉴다. 새콤달콤한 비파에이드는 언뜻 복숭아 혹은 살구가 떠오른다. 미식의 도시 목포에서 만나는 색다른 맛이다.
목포는 항구다
다시 1897개항문화거리로 나선다. 목포의 잘 닦인 도로가 새삼 애통하게 다가온다. 과거 일들이 떠올라서다. 근대도시의 반듯한 길 위로 일본 기관이 들어서고, 1910년부터 본격적인 수탈이 시작된다. 상념 속에 이리저리 거닐다 목포 대중음악의 전당을 맞닥뜨린다.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을 새롭게 단장해 올해 문을 연 곳이다. 붉은 벽돌로 감싼 외관이 견고한 인상을 준다.
출입문 위 회색 벽돌에 새긴 글자를 천천히 읽어 본다. '조흥은행목포지점'. 가만히 바라보니 '조흥' 두 글자만 벽돌 크기가 다르다. 호남은행이 조흥은행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나머지는 그대로 둔 채 은행명 부분만 교체해서 그렇다. 눈여겨볼 것은 포(浦) 자다. 점 하나가 없다. "호남은행을 설립한 현준호가 독립이 되거든 점 찍겠다고 남긴 것인데, 여태 그대로네요." 이옥희 문화관광해설사가 친근하게 말을 붙인다. 획 하나에도 독립을 염원하며 의미를 부여하던 시절이 애절하고, 또 애틋하다.
목포는 개항 이후 상업 도시로 크게 성장했다. 당시 목포에는 일본계 은행이 이미 들어와 있었지만 민족 은행은 없었다. 이에 현준호 등 지역 유지가 모여 자본금 150만 원으로 호남은행을 설립했고, 상권의 중심지였던 오거리 한복판에 호남은행 목포지점이 들어섰다. 1926년 일이다. 이 건물은 민족자본의 지방은행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2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선다. 목포 대중음악의 전당으로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상량문이 눈에 띈다. 건축 시기와 축원을 바라는 글을 나무패에 새겼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일본 계열의 식산·십팔·조선은행 사진도 전시했다. 지게를 짊어진 남성, 아이를 업은 아낙이 건물 앞을 지나가는 모습이 담겼다. 머지않은 과거, 한국이 주권을 빼앗긴 시절이다. 잠시 서늘한 기분을 느낀다.
2층은 본격적인 대중음악 공간이다. 최초의 대중가요, 목포 대중음악 연표 등을 살핀다. 걸출한 목포 출신 음악가도 소개하는데, 가수 이난영을 빼놓을 수 없다. 1935년에 발표한 노래 '목포의 눈물'은 전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애환을 위로하는 가사 덕분이다. "2절 가사 가운데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으로부터 이 노래가 나올 때까지가 삼백 년입니다. 오랜 시간 일본에 원한을 품었다는 것이지요. '노적봉 밑의 임'은 이순신 장군을 의미하고요". 간드러지면서도 애달픈 음색에 귀 기울인다.
목포를 수식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1흑3백'이다. 3백은 나주평야 일대의 쌀과 신안의 소금, 고하도의 면화를, 1흑은 김을 뜻한다. 풍부한 자원이 모여든 목포항을 빗댄 표현이다. "목포항은 일본으로 이출되는 쌀, 소금, 면화가 하얗게 쌓여 있었을 정도라고 해요. 수탈이 극심했기에 저항도 컸던 곳이 목포입니다. 목포 사람들은 쟁의와 노동운동으로 맞서기도 했습니다."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그 시절 청춘들이 거리에서, 식당에서 목 놓아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모습을 그려 본다. 이난영의 노래는 힘든 세월을 함께한 가요였을 것이다. 모진 시간을 씩씩하게 살아온 목포 시민과 목포는 꼭 닮았다. 역사를 품고 오늘을 나아가는 목포는 뜨거운 항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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