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라 서툰 아빠의 솔직한 반성문 상담학자 조영진 교수
마흔을 바라보는 남자가 담담하게 자신의 유년 시절 기억을 꺼내자 상담자가 터지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다 눈물을 떨궜다. 내담자(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가 오히려 당황했다.
"왜 그러세요? 뭐가 그렇게 마음이 아프신데요?"
"그 아이가 너무 외롭잖아요."
홀어머니와 사는 아이는 엄마가 늦은 밤 일터에서 돌아올 때까지 혼자였다. 함께 놀던 친구들조차 학원에 간다며 자리를 뜨면 갈 데 없는 아이는 혼자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네 번의 신호를 받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놀이를 생각해냈다. 자신이 혼자이고 아무것도 할 일 없는 아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그저 빠르게 걸었다.
상담자는 이내 알아챘다. 아이 안에 가득한 무기력과 슬픔과 외로움을. 정작 남자는 그때까지 자신이 외롭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사실 그 외로움이 너무 힘들었고 너무 아팠고 그래서 그 외로움과 마주하는 것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에 평생 그 외로움의 시간을 무의식 안으로 밀어 넣고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왔다. 그 봉인이 해제되는 순간 상담자와 내담자는 함께 울었다.
"아버지가 있지만 내 아버지는 아니었다"
조영진(55) 서울장신대학교 교수(영성심리치유대학원장)는 목사이자 상담학자다. 신학대학을 나와 대학원에서 상담학을 전공했고, '한보듬아빠(싱글대디)로서의 삶의 경험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빠 없이 자라서 아빠가 평생 연구 주제가 됐고 그런 아빠들과의 상담을 통해 진짜 아빠가 되어가는 경험을 하고 있다. 최근 펴낸 '아빠 반성문’(세이코리아)은 그 과정을 담은 책이다.
‘네 개의 횡단보도 건너기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가난한 집 아이’는 외로움을 몰랐다. 어린 영진은 상상 속의 아빠를 그리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있는 아이를 부러워해본 적도 없었다. 대신 아버지라는 존재를 지워버렸다. 학교나 직장에서 누구보다 잘 적응했고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누구와도 잘 지내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홀어머니 밑에서 형제 하나 없이 자란 외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랐다.
‘도대체 아버지란 존재는 왜 필요한가’라는 생각은 자신이 아빠가 되면서 깨져나갔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아빠라고 불러보지 못한 자신과 달리 서슴없이 아빠, 아빠 하며 안기는 '내 아이’가 그에겐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오히려 밥 먹다 투정하는 아이에게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의 산만함을 지적하고, 함께 놀면서도 규율과 정의를 가르치려 들다 아이가 펑펑 우는 것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서툰 아빠’는 어느새 '나쁜 아빠’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빠라는 존재를 모르고 컸으니 어떻게 아빠가 돼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빠가 될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아버지가 미워졌다.
"사회에서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가장 기초적인 배움의 시작이 바로 '아빠와의 동일시’입니다. 아이는 아빠의 행동과 태도로 드러나는 삶을 통해 말로는 가르칠 수 없는 그 무엇을 스스로 배웁니다. 그런데 저처럼 아빠 없이 자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동일시의 대상이 없다는 것이죠. 동일시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함께’입니다. 상담할 때 강조하는 말도 '가르치지 말고 그냥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돈을 쓰고 매일매일 있는 그대로의 아버지 모습이야말로 아이가 배워야 할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아빠의 부재와 무의식 속에 감춰진 외로움은 내 아이에게만큼은 진짜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변질됐다. 자식을 외롭지 않게 만들어주는 아빠, 이제껏 자신이 마음속으로 간절히 요구했던 것들을 모두 채워줄 수 있는 아빠, 엄마와 헤어져 다른 사람과 사는 일 따위는 절대 안 하는 아빠, 집에서 늘 자신을 기다려주는 아빠, 아득하고 두렵기만 하던 삶의 매일매일에 명확하고 분명한 답을 주는 아빠.
하지만 '좋은 아빠’가 되겠다는 욕망이 아빠도 힘들고 아이도 힘들고 아내도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가족이 원하는 것은 '좋은 아빠’가 아니라 쉬는 날 집에 있고 재미있는 일에 함께 웃고 아이의 성적이 떨어지면 잔소리도 한번 하는 '그냥 그런 아빠’였던 것이다. 조 교수는 초보 아빠 시절을 무면허 조종사가 운전하는 비행기에 비유했다. 배워본 적도 없는 아빠 노릇을 하겠다며 조종 칸을 잡았다가 가족들과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야 할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낸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했다.
‘국제시장’의 덕수는 괜찮은 아빠였을까
"아이를 통제하고, 가르치고, 어떻게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아이의 삶을 강요하는 아빠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라는 망설임과 '아이가 잘못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있어요. 그 망설임과 두려움이 아이와 가족에게 왜곡돼 표현되고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낳아 회복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죠."
중학생인 아이는 5만 원짜리 스니커즈를 원했는데 아버지는 20만 원짜리 유명 브랜드 운동화를 사가지고 왔다. 아이의 표정이 떨떠름하자 아버지는 화를 냈다.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집마다 한 번씩은 있을 법한 일 같지만 이처럼 사소한 오해가 두고두고 쌓이면 깊은 상처가 된다. 조 교수가 상담한 스물여섯 살 청년의 이야기다. 운동화 사건 이후 아이는 절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거나 내색하지 않았고 그럴수록 아버지는 더 화를 내고 다그쳤다. 대학을 선택하는 시점에서 둘의 관계는 완전히 어그러졌다. 아버지의 강요로 삼수까지 한 아들은 결국 복수하듯 지방에 있는 다른 대학을 선택해 집을 떠났다.
"부모는 '다 너를 위해서야’라고 하지만 아이는 원치도 않은 것을 받고 왜 감사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거죠. 애초 아이에겐 '그거 아닌데요’ '난 그건 싫어요’ '전 저게 좋아요’라고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아니 말하기도 전에 부모가 결정해버렸으니까요."
공공장소에서 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악을 쓰며 운다. 아빠는 우는 아이를 외면한 채 화난 표정으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지금 아빠는 아이와 기 싸움을 하는 중이다. 아빠의 표정은 언제까지 울 수 있는지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아빠는 아이의 항복을 요구하고 있다. 좋은 아빠일까, 나쁜 아빠일까, 괜찮은 아빠일까.
조 교수는 무엇이 저 아이를 저렇게 서럽게 한 걸까 안타깝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치하는 부모를 보면 불편하다고 했다. 간혹 "아이에게 울고 떼쓴다고 모든 게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거나 "아이의 사회성은 아빠가 가르쳐야 한다"며 무용담을 이야기하는 아빠들이 있다. 그러나 조 교수는 아이와 그런 '밀당’을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했다. 아이는 밀당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저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짜증이 나서 화를 내고 있을 뿐이다. 더 한심한 건 그래도 아이가 계속 울면 아빠들은 아이가 자신을 우습게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아이가 왜 우는지는 관심 밖이 되고 아빠의 분노만 남게 된다.
"아이는 그렇게 아빠로부터 외면당할 만큼 아빠를 화나게 할 만한 잘못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아이는 그냥 아이죠. 아이에게 울음은 생존을 위한 중요한 도구일 뿐입니다. 아이가 울 때 엄마 아빠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 아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여야 합니다. 대단한 요구를 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아이의 필요를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눈을 부라리고 윽박질러서 울음을 그치게 하는 건 폭력이죠. 당장은 울음을 그칠지 모르지만 욕구가 해결된 게 아니잖아요. 아이의 분노는 그대로인데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까 속으로 삭이는 거죠. 그런 식으로 상처가 쌓이면 아이의 무의식 깊은 곳에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자신만의 방식이 만들어집니다. 그 아이에게 사람들은 모두 뭔가를 요구하면 자신을 책망하고 심지어 자신을 처벌할 사람들이지요. 그러니 상대의 기분이나 표정에 예민하고 눈치를 보고 의사 표현을 하지 않고 늘 회피하려는 것이 그것입니다.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우는 아이가 부모보다 더 힘들다는 거예요. 울고 있는 아이를 방치하는 것은 부모들의 이기적인 무능함이에요."
아이에게 아빠는 슈퍼맨이 돼야 한다
"나는 울지 못했어요. 내가 울면 어머니가 힘들어하실 게 뻔하니까. 그런데 우리 아이는 '우리 아빠한테 이를 거야~’ 하며 엉엉 울어요. 나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말이죠. 아빠는 아이에게 완전한 슈퍼맨이 되어주어야 해요. 아이로 하여금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경험이 충분하도록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발달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릭 에릭슨은 영아기 부모로부터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는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이는 곧 아이에게 자신과 주변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감을 갖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아빠를 슈퍼맨처럼 여기고 아빠에게 이르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수 있다는 신뢰를 가지게 된다는 것은, 영아기에 해결해내야 할 과제인 신뢰와 불신의 위기를 잘 극복해냈다는 반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 아빠한테 이를 거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렇게 다짐하곤 했다.
"그래, 사랑하는 내 아이야. 내가 언제나 네 곁에 있어줄게. 네가 아빠를 부를 때마다 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 되어줄게. 아빠가 꼭 그런 사람이 되어줄게."
어느새 그 아들이 훌쩍 컸다. 아빠는 자라면서 구경도 못 해본 비싼 브랜드 옷을 입고 신형 휴대폰을 쓰고 해외여행을 간다. 꿰맨 양말을 신고 다녀도 부끄럽지 않은 아빠는 아들의 씀씀이가 불편했다. 그의 불평을 들은 친구가 한마디 했다.
"넌 가난한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살았지만 네 아들은 교수 아들로 사는 거야. 삶의 방식과 생각이 다른 게 당연하지."
그 말을 듣고 조 교수는 내 삶의 방식과 생각을 아이도 똑같이 가져주기를 바라는 자신을 돌아봤다. 말로는 "괜찮아, 네가 원하는 것을 사"라고 하면서도 표정은 "No"라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에 태어난 아빠가 21세기에 태어난 아이에게 똑같은 삶의 방식을 강요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아빠의 반성문은 그렇게 또 한 줄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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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해윤 기자
김현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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