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 세월 머금은 고려의 빛 돌아왔다
문화재청,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 공개
4만5천개 자개 장식…“최고 수준 유물”
세계적으로 20점 안팎 현존 희소성 높아
국내에 3점 밖에 없는 고려시대의 나전칠기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가 일본에서 돌아왔다.
800여년 전 제작된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는 그동안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은 유물로 예술적·기술적으로도 빼어난데다, 나전(자개)의 오색 영롱한 빛이 생생할 정도로 보존상태도 최상급이어서 현존하는 최고 수준의 고려 나전칠기라는 분석이다.
현재 공식적으로 온전한 형태(완형)의 고려시대 나전칠기는 일본·미국 등 세계적으로 20점 안팎, 국내에는 단 3점 만이 전해지고 있다. 불경을 담은 상자인 ‘나전 경함’(보물)과 지난 2020년 일본에서 환수한 ‘나전 국화넝쿨무늬 합’, 불교용품으로 대모 바다거북의 등껍데기가 장식된 ‘나전 대모 국화넝쿨무늬 불자(拂子)’ 등 3점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문화재청은 6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의 개인소장가로 부터 구입·환수한 고려시대(13세기) 나전칠기 공예품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를 언론에 공개했다.
나전칠기는 오색영롱한 빛과 오묘한 무늬의 나전(자개·전복과 소라 등 특정 조개류의 껍데기를 얇게 가공한 장식물)을 가공해 장식하고 여러 번의 옻칠을 한 공예품이다. 극히 미세한 1~5㎜ 크기로 얇게 가공한 나전을 일일이 붙여 꽃같은 무늬를 만드는 등 고도의 정교함과 복잡한 제작과정을 거쳐 완성되기에 공예기술의 집약체로 불린다. 이에 따라 고려 나전칠기는 고려청자, 고려불화와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미술공예품으로 손꼽혀왔다. 또 한국의 대표적 전통 공예로 지금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무려 4만5000개의 자개가 장식된 최고 수준의 작품
이번에 환수된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는 13세기 고려 나전칠기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다.
폭 33.0×18.5㎝에 높이 19.4㎝ 크기의 상자에 약 4만5000개의 자개가 장식될 정도로 정교함을 뽐낸다. 상자에는 고려 나전칠기의 대표적 무늬인 국화넝쿨, 모란넝쿨·연주(連珠) 무늬(점·작은 원을 구슬을 꿰맨듯 연결해 만든 무늬)가 모두 있다.
우선 상자 전체 면에는 약 770개의 국화넝쿨무늬가 장식됐다. 국화꽃 무늬는 중심원 크기가 약 1.7㎜, 꽃잎 하나의 크기는 2.5㎜에 불과할 정도로 세밀하다. 나아가 작은 꽃잎 하나하나 마다 음각으로 선을 새겨 세부를 정교하게 표현했다. 뚜껑 윗면(천판) 테두리의 좁은 면에는 약 30개의 모란넝쿨무늬를 배치했으며, 외곽 부분에는 약 1670개의 연주무늬가 촘촘하게 둘러져 있다.
또 국화꽃 무늬를 감싸고 있는 넝쿨 줄기는 C자형 금속선으로, 외곽 경계선은 두 선의 금속선을 꼬아 표현했다. 더욱이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는 자개 본래의 오색 영롱함을 생생하게 보여줄 뿐아니라 자개와 금속선 등 장식 재료의 보존상태도 현존하는 고려 나전칠기 중 매우 탁월한 것으로 평가된다.
전문가들은 이날 “자개로 국화와 모란 무늬를 상자 전면에 빼곡하고 규칙적으로 배치하고, 단선의 금속선으로 넝쿨 줄기를 묘사한 점, 매우 작게 오려낸 꽃잎 자개에 음각의 선을 그어 세부를 표현한 점 등은 고려 나전칠기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전통 공예 연구의 권위자인 박영규 용인대 명예교수는 “기존에 알려진 고려 나전칠기들보다 영롱한 빛이 뛰어나고 무늬들도 매우 정교해 학술적·예술적·기술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며 “특히 그동안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 나전칠기가 확보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이번 환수 과정에서는 고려 나전칠기의 제작기법, 재료 등을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분석해 밝혀냈다”고 밝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지난 7월 복권기금으로 매입을 확정하기 이전인 지난 5월에 국립고궁박물관이 X선 촬영 등 과학적 조사를 통한 정밀분석을 한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이현주 학예관은 “분석 결과 나무로 상자 틀을 만들고 직물(삼베)을 입힌 뒤 그 위에 꼼꼼하게 옻칠을 한 ‘목심저피칠기(木心苧被漆器)’로 우리나라의 전통적 칠기 제작기법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번 환수를 추진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는 지난해 7월 일본 현지에 있는 협력망을 통해 처음으로 그 존재가 확인됐다. 이후 1년여 동안 문화재청과 함께 치밀한 조사와 매입 협상 끝에 지난 7월 환수에 성공했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이날 “어려운 과정을 통해 환수한 고려 나전칠기가 수작으로 평가돼 환수의 의미가 더 값지다”며 “앞으로 나전칠기의 전통기술 복원을 위한 연구, 국민들의 문화유산 향유 확대를 위한 전시 등에 다양하게 활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단 3점의 고려 나전칠기는?
고려시대 나전칠기는 빼어난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한 수준 높은 예술성으로 유명하다. 삼국시대부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시대에는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할 정도로 발전했다. 조선시대에는 사용자층이 넓어지고 형태도 다양화돼 귀중한 물건을 담는 상자, 가구, 소반, 베갯모 등으로 확산됐다. 현대에도 꾸준히 사랑받아 제작되는 공예품이기도 하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고려 나전칠기는 당시에도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에서 인기가 높은 공예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중기인 1123년(인종 1년)에 송나라 사절로 고려에 온 서긍이 당시 고려의 갖가지 문물과 풍속 등을 기록한 자료인 ‘선화봉사고려도경’(고려도경)에 ‘나전 솜씨가 세밀하여 가히 귀하다’고 기록돼 있다. 또 역사서인 ‘고려사’에는 이미 11세기에 고려 조정이 송·요나라 등 외국에 보내는 선물 품목에 나전칠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걸작의 공예품인 고려 나전칠기는 현존하는 유물이 극히 적다. 제작의 어려움에 따라 한정된 숫자가 만들어진데다 재료적 특성 등 여러 이유 때문이다. 박영규 교수는 “당시에는 특수 계층이 사용한 귀한 공예품으로 많이 제작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주로 불경을 보관하는 상자인 경(전)함, 염주를 담는 염주함, 마음의 번뇌를 털어 없앤다는 상징적 의미로 스님들이 지녔던 불자 등 불교의례품, 화장 용기 등이 알려져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제작된 숫자가 적은데다 나전칠기의 틀이 주로 목재이고, 장식이 워낙 정교하다보니 전쟁, 화재 등에 쉽게 훼손돼 오랜 세월 보존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현재 공식적으로 알려진 고려시대 나전칠기는 세계적으로 20여점 안팎이며, 국내에는 3점 뿐이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돼 있는 ‘나전 경함’은 경전 두루마리를 보관하는 상자로 고려 후기(13세기) 때 작품이다. 국내의 유일한 나전칠기 경함으로 고려 후기의 빼어난 예술성과 나전칠기 제작기술을 보여줘 학술적·예술적·기술적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나전 국화넝쿨무늬 합’은 2021년 12월 일본에서 환수해 이듬해 7월 공개된 고려 나전칠기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모자합(母子盒·하나의 큰 합 속에 여러 개의 작은 합이 들어간 형태)에서 속에 들어 있는 작은 합인 자합(子盒) 중의 하나다. 세계적으로 단 3점만이 온전한 형태로 전해져 4번째 확인된 것이자, 국내적으로는 유일한 형태의 고려 나전칠기다. 길이 약 10㎝, 무게 50g의 작은 이 나전합은 영롱하게 빛나는 자개, 붉은색이 도는 온화한 색감의 대모(玳瑁·대모 바다거북의 등 껍데기), 연주문의 뚜껑 테두리, 금속선 등을 활용했으며 유려한 국화넝쿨 무늬로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또 한 점은 ‘나전 대모 국화넝쿨무늬 불자’로 거의 완형을 갖춘 유일한 고려 나전칠기 불자다. 양 끝에 매다는 털 등은 없어지고 현재 길이 42.7㎝, 지름 1.6㎝의 대만 남아 있다. 붉은색·주황색의 꽃술·꽃잎이 정교하게 장식돼 있다.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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