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초보, 1만2500㎞ 달리며 “플라스틱은 필요 없어요”
“필요 없어요!”
유라시아 자전거 여행자 신혜정(38)씨는 1만2500㎞ 여정 중 이 말을 가장 많이 외쳤다. 외친 장소는 주로 빵집, 노점 등 먹거리를 파는 상점. 상인들이 비닐봉지에 음식을 넣기 전에 재빨리 외쳐야 한다.
천천히 개미를 보면서 자전거를 끌고
신혜정씨는 2018년 5월15일부터 2019년 12월30일까지 1년7개월여 동안 중국 동남쪽 항구 롄윈강에서 튀르키예 수도 이스탄불까지 자전거를 타고 여행했다. 체지방을 연료 삼아 두 발로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는 무동력 자전거 여행에 더해 플라스틱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것을 지향하는 ‘제로웨이스트’ 여행을 했다. 그래서 그의 필수 회화는 기민함을 동반한 ‘필요 없어요!’였다. 특히 중국 빵집에서는 세 번 외쳐야 한다. 빵을 얇은 비닐에 한 번, 큰 비닐에 한 번 더 싼 뒤 위생장갑까지 챙겨주기 때문이다. 자칫 때를 놓치면 비닐봉지, 비닐장갑, 일회용 수저 등 각종 플라스틱이 척척 가슴팍에 안기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2023년 8월28일, 플라스틱 쓰지 않는 유라시아 자전거 유람 여정의 좌충우돌과 희로애락을 담은 책 <이토록 우아한 제로 웨이스트 여행>(사우 펴냄)을 쓴 신혜정씨를 서울 한 카페에서 만났다. 여행 전 기후대응 시민단체 ‘푸른아시아’의 7년차 활동가였던 그는, 여행 뒤 환경교육 석사를 마치고 9월부터 박사과정에 들어간다. ‘천주교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위원회(JPIC)'와 ‘국제기후종교시민네트워크'에서 기후대응 관련 일을 돕고 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한 번도 타보지 않았던 자전거라 처음엔 걱정도 했는데, 천천히 개미를 보면서 가기로 마음먹으니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신씨는 해사하게 웃으며 여행 출발 당시의 결심을 전했다.
그렇다. 그는 자전거 생초보자면서 자전거를 타고 중국 국경을 넘어 베트남을 지나 산 넘고 물 건너 라오스를 지나고 미얀마의 언덕을 오르내리다 급기야 세계의 지붕 파미르고원까지 13개 나라를 내달렸다.
준비 과정은 철저(?)했다. 자전거여행을 결심하고 4개월 동안 탈 자전거와 각종 자전거여행 물품을 검색했다. “가성비에 몸을 던지는 스타일”이라 자전거 구매 예산은 50만원 선으로 정했다. 물품은 중고를 주로 이용했다. 몸에 잘 맞는 국내 종주용 30만원짜리 자전거를 산 뒤 장기 자전거 여행자들의 메카인 ㅂ자전거 가게 사장님의 조언을 얻어 타이어와 핸들만 고급 사양으로 교체했다. 가슴이 답답해진 건 그 뒤다. 자전거 장기여행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실전과 같이 짐을 챙겨 자전거에 매달고 국내 시범 여행에 나섰다.
사람으로 길로 연결되는 여행
땅끝마을 전남 해남에서 충북 충주까지 가기로 했다. 20대에 ‘박카스 국토대장정’에 떨어진 뒤 나 홀로 무전으로 통일전망대까지 도보로 종주한 루트였다. 그때는 분명히 평탄한 길이었다. 그러나 자전거 핸들바에 짐을 하나 걸고, 자전거 짐받이(랙)에 20ℓ들이 가방 둘, 31ℓ 가방 하나를 꽉꽉 채워 길을 나서니, 아주 미미한 오르막에도 자전거 페달조차 밟아지지 않았다. “어어?” “이거 내가 탈 게 아닌가?” 이미 자전거도 샀는데 가능성을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2주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힘들면 버스도 타고 기차도 타면서 내 속도로 가자’였다. ㅂ자전거 가게의 자전거여행 교육을 2박3일 수강한 뒤 타이어 펑크 땜질하는 법 등을 배우고 자신감이 조금 더 올라갔다. 다만, “하루 50㎞ 정도로 천천히 가겠다”고 계획을 말하면 “음, 걸어가는 게 어때?”라는 진지한 조언이 돌아오긴 했다.
그래도 왜 자전거를 고집했을까. “유라시아 대륙은 너무 광활해서 걸어가면 혜초 스님처럼 3~4년은 걸릴 것 같아 엄두가 안 났어요. 자동차로 가면 목적지 외 경로는 그냥 지나치게 되는데 자전거로 가면 흙, 바람, 나무를 느낄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길을 지나는 동안에도 그 공간과 거기 사는 사람들과 많이 마찰하면서 가고 싶었거든요.”
신씨의 이런 생각은 옳았다.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신씨의 ‘유라시아 유람’은 목적지로 길이 연결되는 여행이 아니라 사람으로 길이 연결되는 여행이었다. 그의 책 <이토록 우아한 제로 웨이스트 여행>에는 전래동화에서나 보던 ‘밥 먹었니’ ‘밥 먹고 가’ ‘자고 가’ ‘(돈 안 받아) 그냥 가’라는 대화로 가득하다. 타이에서 고개를 넘다 만난 노점 아저씨는 없는 얼음을 갈구하는 그에게 딸기 한 봉지를 그냥 내준다. 미얀마에서 인도 임팔로 넘어가기 전 “밥 있나요”를 외치며 들어간 그에게 할머니는 한 상 가득 밥과 반찬을 차려줬다. 그곳은 식당이 아니라 그냥 집이었다.
인도 마니푸르에서 만난 아미짓 아저씨네 가족은 난생처음 보는 자전거 여행자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 마룻바닥에 커리, 된장찌개 맛이 나는 마니푸르 향토 음식 이룸바 등을 풍성하게 차려줬다. 그러곤 “동네축제 가볼래?” “하룻밤 자고 갈래?” “보내기 아쉬우니 하루만 더 자고 가” 하여 결국 ‘마니푸르 삼일야화’를 썼다. 신씨는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사람들의 곁을 느끼며 길을 이어갔다.
쓰레기와 연결점을 찾다
신씨가 이번 여행에서 한 가지 더 추가한 목표가 있다. 플라스틱이 버려져 쓰레기가 된 뒤 재활용되거나 처리되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 신 씨 는 처음 여행 경로를 짤 때 출발지와 종착지 외에 꼭 가고 싶은 세 곳을 찍은 뒤 점을 이어 선을 그렸다. 그 가운데 한 곳은 과거 세계 최대 전자쓰레기 마을이었던 중국 광둥성 산터우시 구이위였다. 구이위는 2014년까지만 해도 컴퓨터, 텔레비전 등 세계의 고체 전자쓰레기가 모여드는 마을이었다. 당시 이 쓰레기는 주로 가족 단위로 처리됐다. 주민들은 맨손으로 폐전자제품을 분해하고 처리장치 없이 태웠다. 아이들은 물론 작업자들은 납과 카드뮴에 그대로 노출되고 독성 강한 연기를 그대로 마셨다. 9월9일에도 미얀마 피란주민을 위한 긴급식량 ‘비스킷'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후원 주점이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지하 1층에서 열린다. 2015년 중국이 재활용산업을 정비하면서 구이위에도 재활용 공장 단지가 들어섰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중국에 도착해서 매번 플라스틱 재활용 공장을 기웃댔지만 문 앞에서 제지당했는데 희한하게 구이위 재활용처리공장은 활짝 열려 있었다. 신씨가 자전거로 둘러본 그곳은 여전히 “검은 전자기판, 키보드, 초록 전자회로기판이 들어 있는 포대가 높이 쌓여 있고 그 사이사이에 앉은 사람들이 얇디얇은 장갑만을 끼고 그것들을 만지고 두들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언가를 체로 거르고 무언가가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신씨는 “내가 이 쓰레기와 연결돼 있음을 오감으로 느꼈다”고 말했다. “지금 한국의 쓰레기가 이곳까지 오지 않더라도 내가 버린 쓰레기가 어디선가 이런 방식으로 처리될 것이고, 어쩌면 내가 이전에 버린 쓰레기는 이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처리됐고 그 쓰레기가 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쓰레기와의 연결점을 찾은 신씨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도 이어갔다. 또 다른 목적지 인도 라다크에서 쓰레기 트럭을 히치하이크했다.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지음)에서 읽었던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문화는 ‘관광 여행자’들의 성지가 돼버린 뒤 흐릿해져 관광 성수기인 여름엔 쓰레기양이 평소의 5배가 돼버렸단다. 라다크에서 “개와 소와 쓰레기가 뒤섞인 쓰레기밭”을 보면서 신씨는 “물건이 버려질 때의 처리를 고려하지 않고 물건을 많이 만드는 것, 많이 파는 것, 좋은 물건을 싼값에 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다.
‘한 달 살기’를 했던 타이의 시사아속 공동체 쓰레기 재활용장에서 일하면서 재활용작업장 한쪽에 고쳐진 채 주인을 찾는, 한때 버려졌던 시계·밥솥·옷가지를 매일 보며 “쉽게 쓰고 쉽게 버리는 문화보다 작은 것도 살뜰하게 존중하고 아끼는 문화가 우아한 문화”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돌아올 때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생초보’로 시작한 유라시아 자전거 여행자 신씨는 지나는 곳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환대, 더위를 식혀준 나무 그늘과 우물물의 도움, 서진(西晉)을 순조로이 도와준 순풍과 객기를 부리게 해준 역풍의 도움 등으로 출발 1년4개월 만에 초고난도라는 파미르고원도 무사히 넘고 한국에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탔다.
여행은 그를 바꿨다. ‘환경력’은 업그레이드됐다. 쓰레기가 처리되는 모습을 보면서 물건을 사기 전에는 물건이 버려질 때를 생각한다. 더 오래 고심해서 산다. 플라스틱을 최소한으로 쓰는 삶이 몸에 스며든 덕인지 텀블러가 없으면 테이크아웃은 하지 않는 힘이 생겼다. 고산지대 파미르에서 역풍 맞으며 ‘한강을 달리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을 기억하며,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꿈’이자 ‘로망’임도 되새긴다.
그리고 여정 내내 그에게 손 내밀어줬던 이들과 항상 연결돼 있음을 기억한다. 최근 미얀마 군부의 폭격으로 그가 지났던 길에 살던 사람들도 집을 잃었다. 신씨는 해외주민운동연대와 함께 접경 지역인 타이에서 비스킷을 생산해 미얀마에 전달하기 위한 모금 활동을 했다. 9월9일에도 미얀마 피란주민을 위한 긴급식량 ‘비스킷'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후원 주점이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지하 1층에서 열린다. 이 행사 소개를 기사에 넣을 수 있다는 말에 가장 환히 웃던 신씨의 얼굴에서 다시 한번 ‘연결’의 의미를 되새긴다.
동남아보다 중앙아시아가 쉽다
여행이나 일상에서 플라스틱을 덜 쓰기 위해서는 ‘기본 패키지’를 잘 챙겨야 한다. 기본 패키지 품목으로는 물통, 반찬통, 개인 수저, 지퍼백, 천주머니, 개인 빨대가 있다.
크기와 개수는 여행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자전거 여행자라면 페트병에 담긴 생수를 사지 않는 것이 ‘제로웨이스트’의 첫걸음이다. 자전거 여행자는 큰 물통, 작은 물통 두 개가 기본 상비 품목이다. 전날 밤 수돗물 등을 받아 숙소의 전기주전자로 끓여서 식힌 뒤 큰 물통에 많이 담고 작은 물통에 먹을 만큼 덜어서 먹으면 생수를 살 필요가 거의 없다.
타이 등 동남아 지역에서는 시장 등에서 음식을 사서 바깥에서 먹을 일이 많다. 이럴 때는 반찬통이 있으면 플라스틱 쓰레기를 많이 줄일 수 있다. 지퍼백은 각종 빵, 쿠키, 젤리 등 간식류를 살 때 사용하되 버리지 않고 깨끗이 씻어서 재사용한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천주머니가 유용하다. 건조한 지역이라 말린 음식, 견과류가 많고 웬만한 쿠키도 다 통에 담겨 있는 걸 꺼내 무게를 달아 파는 시스템이다. 가장 마음 편하고 행복하게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할 수 있는 곳이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다만 이렇게 플라스틱 포장이 돼 있지 않은 음식을 담을 천주머니 등 용기가 있어야 ‘제로웨이스트 친화적 환경’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밖에서 음식 먹을 일이 의외로 많다. 이때 개인 수저가 없으면 일회용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게 된다. 또한 대부분 플라스틱 빨대라, 빨대로 음료 먹는 걸 좋아하는 경우 개인 빨대를 준비해 다니면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일 수 있다.
박수진 자유기고가 surisurij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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