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기이하고 아름다운 시한폭탄 [무비뷰]

서지현 기자 2023. 9. 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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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투데이 서지현 기자] '잠'은 시한폭탄과 같다. 내 삶의 가장 일상적 공간과, 가장 가까운 존재가 보여주는 낯선 모습은 기이한 소름을 유발한다.

6일 개봉하는 영화 '잠'(연출 유재선·제작 루이스픽쳐스)은 행복한 신혼부부 현수(이선균)와 수진(정유미)을 악몽처럼 덮친 남편 현수의 수면 중 이상행동, 잠드는 순간 시작되는 끔찍한 공포의 비밀을 풀기 위해 애쓰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총 3부로 구성된다. 무명배우인 현수의 드라마 대사 "누가 들어왔어"라는 잠꼬대로 시작되는 작품은 몽유병의 시작을 알린다. 사소한 잠꼬대로 여겨졌던 현수의 행동은 수면 중 얼굴을 미친 듯이 긁어 흉터를 남기거나 냉장고 앞에서 날것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등 역동적인 행위들로 변해간다.

만삭의 임산부 수진은 그런 현수의 행동을 저지하고, 그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 '둘이 함께하면 극복 못 할 일이 없다'는 두 사람의 맹세 아래 수진은 현수의 기이한 행동에도 꿋꿋이 그의 곁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시간순으로 전개되는 '잠'은 각 이야기들의 사이에 시간의 공백을 둔다. 1부에서 2부를 거쳐 3부로 넘어가며 만삭의 임산부 수진은 출산하고, 아이와 함께 현수의 몽유병을 맞닥뜨리게 된다.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현수의 행동들과 아이를 지키기 위한 수진의 모성애는 때때로 충돌한다.

과연 현수는 수진의 노력대로 몽유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수진 역시 아이와 함께 가정의 평화를 지켜낼 수 있을까.


'잠'은 익숙한 소재와 공간들로부터 가장 낯선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집'과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관계들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가장 기이한 스릴감이다.

현수가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수면 중에는 스스로 몸을 제어할 수 없다. 수진 역시 이를 알고 있으나, 계속되는 현수의 위협에 함께 이성을 잃어간다. 가장 가깝고 단단했던 '부부'라는 존재는 제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한순간 위태로워진다.

여기엔 막강한 사운드를 무기로 앞세웠다. 긴장이 고조되는 음악부터 현수의 기이한 행동에 사운드를 극대화시켜 소름을 유발한다.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주는 공포보다는 수면 중 제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들이 더욱 기괴하게 느껴진다.

'수면장애'라는 의학적 소재에 더해 층간소음이라는 일상적 소재, 또한 무속신앙까지 더해져 '잠'은 익숙한 이야기들을 색다르게 풀어냈다. 3부로 진행되는 흐름 속에서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잠'인지 끝없이 추리하고 추측하는 재미를 더한다.

특히 3부로 구성된 이야기는 시간순 전개를 따랐으나 중간중간 공백을 두며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짧게 스쳐가는 이야기들 속에서 관객들은 부부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상상한다. 각 이야기마다 공간을 뒀으나, 이는 비어있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채움이다. 각 이야기들마다 달라지는 배경 속 색채와 미술적 변화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이야기의 중심엔 주연을 맡은 배우 정유미의 힘이 크다.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부터 그의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광기의 얼굴을 보여주는 정유미의 모습은 다른 작품에선 볼 수 없는 얼굴이다. 이선균 역시 가장 일상적인 모습에서 기묘한 행동들로 소름을 유발한다. 관객들이 익히 아는 얼굴로, 예상치 못한 행위를 보여준다.

'잠'은 올해 열린 제76회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공식 초청됐다. 이른바 '봉준호 키즈'로 이름을 알린 유재선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한정적 공간과 일상적 소재들을 극강의 사운드와 콤팩트한 이야기로 덧댄 유재선 감독은 가장 신선한 이야기를 펼쳐냈다. 과연 칸 관객들에 더해 국내 관객들에겐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해진다.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 타임은 94분이다.

[스포츠투데이 서지현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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