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 “누군가 들어왔어”…사랑이 공포로 변할 때[시네프리뷰]
2023. 9. 6. 07:07
가장 사랑하고 믿던 사람이 서서히 폭력의 주체로 변해갈 때…. 야무지고 군더더기가 없다.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영민한 작품이기도 하다. 주연을 맡은 정유미·이선균의 연기도 큰 동력으로 작용한다.
제목 잠(Sleep)
제작연도 2022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94분
장르 미스터리
감독 유재선
출연 정유미, 이선균
개봉 2023년 9월 6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표면적으로 하나의 사건을 쫓아가지만 주된 서사와 병행해 다른 사건이나 주제를 다양하게 얹어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하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다. 소위 ‘멀티 레이어드(Multi Layered)’ 영화다.
멀티 레이어드는 원래 여러 겹의 옷을 겹쳐 입어 꾸민다는 패션 용어로 사용됐다. 지금은 다방면에서 다중적 기능, 또는 다층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영화도 보통 하나 이상의 상징과 은유를 포함한다. 하지만 멀티 레이어드 영화로서 차별성을 인정받으려면 부가적으로 얹는 이야기나 주제 역시 하나의 온전한 서사로서 전개되고 귀결돼야 한다. 주로 공포영화 장르에서 많이 발견된다.
대표적인 작품이 1992년 버나드 로즈 감독이 연출한 <캔디맨>이다. 영국 소설가 클라이브 바커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 도시전설로 전해지는 빈민가의 살인마 캔디맨에게 맞서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남편의 외도로 상실감과 외로움에 고립된 한 여인이 자기희생을 통해 진정한 안식에 도달하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유사한 예로 <나이트 플라이어>(1997)나 <진저 스냅>(2000) 같은 영화가 있다.
영화 <잠>이 반가운 이유 중 하나는 한국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멀티 레이어드를 제대로 구현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한국형 ‘멀티 레이어드’ 공포영화
한참 신혼의 달콤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현수(이선균 분)와 수진(정유미 분). 어느 날 밤 만삭의 몸인 수진은 현수가 침대 끝에 앉아 “누군가 들어왔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다시 잠이 드는 모습을 목격한다.
이날 이후 현수는 밤마다 깨어나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고 부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현수의 증세는 그러나 점점 악화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를 바라보는 수진의 공포와 진실에 대한 집착은 커져만 간다.
표면적으로 <잠>은 남편에게 찾아온 이상증세를 극복하려는 부부의 이야기다. 남편의 몽유병에는 초자연적이지만 뚜렷한 원인이 있고 결말에 가서 의문은 명백한 해답을 찾는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잠>은 부부생활의 권태를 느끼기 시작하는 두 사람이 맞닥뜨린 갈등과 화해의 과정이기도 하다.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는 출산모의 위태로운 심리는 여기에 힘을 싣는다.
<잠>은 가장 사랑하고 믿던 사람이 서서히 폭력의 주체로 변해갈 때 맞닥뜨리게 되는 공포를 포착한다. “보통 공포영화나 스릴러는 주인공이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그러나 공포의 대상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만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라고 감독은 말한다.
신인 감독의 깔끔하고 영민한 데뷔작
충무로의 다양한 위치에서 현장경험을 쌓은 유재선 감독이 이 작품을 기획하며 가장 크게 다졌던 각오는 ‘재미있는 장르영화를 만들자’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결혼을 앞두고 있던 상태에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갔다.
데뷔작이라기엔 아주 야무지고 군더더기가 없다.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영민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같은 성취에는 주연을 맡은 정유미·이선균의 연기도 큰 동력으로 작용한다.
정유미는 곧 출산을 앞둔 임신부인 수진역을 야무지게 소화해낸다. 어느 날부터 이상하게 변해가는 남편을 바라보며 연민과 두려움의 감정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던 수진은 점점 강박적으로 변해간다.
이선균은 잠든 사이 자신이 벌이는 끔찍한 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려 애쓰는 안타까운 가장 현수를 연기한다. 평소 선 굵은 연기 스타일을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사이사이 드러나는 순수하고 유약한 모습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두 사람은 <첩첩산중>, <옥희의 영화>, <우리 선희> 등 3편의 영화에서 이미 호흡을 맞춘 인연이 있다. 공교롭게도 모두 홍상수 감독의 영화였다.
‘포스트 봉준호’를 향한 기대
‘포스트 봉준호’, ‘봉준호 주니어’, ‘봉준호가 인정한 천재’…. 유재선 감독을 소개할 때 빈번히 등장하는 수식들이다. 과연 이러한 찬사와 기대는 정당할까?
1989년생인 유재선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사회학과를 졸업한 봉준호 감독과 대학 동문이다. 재학 중 영화제작 동아리에서 다수의 단편영화를 제작하고, 장철수 감독의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의 연출팀으로 영화 현장 일에 발을 디뎠다.
졸업 후 봉준호 감독 <옥자>(2017)의 연출팀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해 4차에 걸친 관문을 통과해 참여하게 됐다. 김용화 감독의 <신과 함께>(2017)에는 사운드 코디네이터로도 이름을 올렸다. 2018년에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 영문자막을 번역했다.
<옥자>로 시작된 봉준호와의 인연은 그의 인생과 작품세계에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완성된 <잠>의 시나리오를 봉준호 감독에게 건넸을 때 봉 감독은 “더 이상 연출부를 하지 말고 바로 영화를 찍어도 되겠다”는 조언을 했다. 이를 계기로 입봉을 결심하게 된다. 두 주인공인 이선균과 정유미의 캐스팅에도 봉준호 감독의 지원이 있었다.
촬영 전에는 봉준호 감독처럼 꼼꼼한 콘티를 완성함으로써 현장에서의 착오를 최소화했다. 그는 “실제 현장에서도 봉 감독님이 <옥자>를 연출할 때 보인 모습을 따르려고 노력했다”고 고백한다.
유재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 <잠>은 여러모로 ‘봉준호’라는 카드의 수혜를 입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필자의 경험으로 미뤄볼 때 어떤 감독의 역량과 재능을 검증하려면 최소 3편 이상의 작품은 지켜봐야 한다. 유재선 감독에게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최원균 무비가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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