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정릉’의 비극과 아들 인종의 의문사[이기환의 Hi-story](99)
최근 조선왕릉과 관련해 반가운 소식 하나가 들려왔습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40기의 왕릉 중에서 유일한 비공개릉이던 서삼릉의 효릉을 9월 8일부터 일반에 개방한다는 겁니다.
효릉은 조선의 12대 왕인 인종(재위 1544~1545)과 부인(인성왕후·1514~1578)의 무덤인데요. 비공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서삼릉의 다른 왕릉과 달리 효릉에 들어가려면 국내 농가에 젖소 종자를 공급하는 젖소개량사업소를 거쳐야 했거든요. 방역 문제 때문에 일반인 출입이 곤란했답니다.
이번에 젖소개량사업소를 거치지 않는 관람료를 따로 마련해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이고요.
정치적으로 조성된 서삼릉
서삼릉은 인종 부부의 ‘효릉’ 외에도 인종 친어머니 장경왕후(1491~1515)의 ‘희릉’, 철종(재위 1849~1863)과 부인 철인왕후(1837~1878)의 ‘예릉’ 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서삼릉’이라고 했죠.
서삼릉은 탄생부터가 지극히 정치적입니다. 1506년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재위 1506~1544)은 조강지처(단경왕후·1487~1557)를 일주일 만에 폐출시키죠. 단경왕후의 아버지(신수근·1450~1506)가 반정 가담을 거절한 죄로 죽임을 당했거든요.
조강지처를 내친 중종이 맞이한 두 번째 부인이 장경왕후입니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1515년 2월 25세의 춘추에 아들(인종)을 낳고 일주일 만에 산후증으로 승하하는데요. 승하한 장경왕후의 능(희릉)은 태종(재위 1400~1418)의 무덤인 헌릉(서울 서초구) 서쪽 언덕에 조성되고요.
그런데 당대의 권신 김안로(1481 ~1537)가 장경왕후의 능을 정치적으로 이용합니다. 당시 김안로는 정적인 정광필(1462~1538)이 희릉(장경왕후릉) 조성의 총책임자였다는 사실을 걸고넘어집니다. “정광필 때문에 희릉이 잘못 조성됐으니 반드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결국 정광필은 이 일로 유배형을 받았고요. 장경왕후의 희릉은 고양 원당(현 서삼릉)으로 이장됩니다(<중종실록> 1537년 4월 25일). 서삼릉의 시작입니다.
남편과 전 부인의 무덤을 떼어놓아라
그리고 1544년(중종 29) 승하한 중종이 희릉(장경왕후릉)의 서쪽 언덕에 묻히는데요. 이것이 ‘정릉(靖陵)’입니다.
또 불과 9개월도 지나지 않은 1545년(인종 1) 인종이 효성이 가득 찬 유언을 남기고 승하하는데요. “내가 죽거든 반드시 부모의 능 곁에 장사 지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종의 유언으로 효릉이 들어섭니다.
하지만 시퍼렇게 살아 있던 중종의 세 번째 부인(문정왕후·1501~1565)이 그냥 있지 않습니다.
문정왕후와 동생 윤원형(?~1565), 봉은사 주지 보우(1509~1565) 등이 원흉으로 등장합니다.
즉 윤원형과 보우가 “‘선릉(성종 및 정현왕후릉·서울 강남구)’ 근처에 명당이 있다”는 말을 퍼뜨리면서 “정릉(중종릉)을 그곳으로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중종-장경왕후’가 아니라 ‘중종-문정왕후’가 함께 묻혀야 한다는 계략이었죠. 그 배후에 문정왕후가 도사리고 있었고요. 그렇게 정릉(중종릉)은 고양(서삼릉)에서 선정릉(선릉+정릉·서울 강남구)으로 옮긴 겁니다(<선조수정실록> 1581년 2월 1일).
길지가 최악의 흉지로 “
남편과 같이 묻히겠다”던 문정왕후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남편의 무덤을 옮긴 그곳이 ‘길지’가 아니라 ‘흉지’였던 겁니다. 이장지로 결정된 곳은 지세가 낮았습니다. 때문에 흙을 쌓아 높이는 데 드는 비용만도 거만금이었답니다.
흉사가 이어졌습니다. 해마다 정릉의 재실(무덤 제사를 위해 지은 집)까지 물이 차올랐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백성이 비분강개했다”고 고발합니다. 이 때문에 1565년 승하한 문정왕후는 남편과 만남을 이루지 못한 채 멀리 태릉(서울 노원구)에 묻혔습니다.
‘7일의 왕비’였던 중종의 첫 부인(단경왕후)은 온릉(경기 양주)에 자리 잡았는데요.
결국 남편과 세 부인은 서울 강남 정릉(남편 중종)과 양주 온릉(단경왕후), 고양 희릉(장경왕후), 노원 태릉(문정왕후) 등 뿔뿔이 흩어지게 됐습니다.
왜군이 파헤친 중종과 성종의 무덤
중종의 무덤을 옮긴 결과는 더욱 참담한 재앙을 낳았습니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선조 26) 4월 13일 왜적이 선릉(성종릉)과 정릉(중종릉)을 파헤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선조실록>). 즉각 현장 발굴에 나선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소장품을 가져가고 관을 불태워버렸다”(<선조수정실록> 1593년 5월 1일)는 겁니다.
<선조수정실록>은 “(중종의) 정릉에서는 형체가 완전한 시신이 수도(隧道·묘의 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옥체(중종의 몸)가 아닌가 하여 양주 송산에 이안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갈수록 태산이었답니다. 젊어서 중종을 모신 이들이 시신 확인차 총출동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이 유골이 정말로 중종의 옥체인지, 아닌지 단정해 말하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정릉뿐 아니라 선릉, 즉 성종(재위 1469~1494)과 정현왕후(1462~1530)의 무덤에서 불탄 재가 보였는데요. 그 재 속에서 뼛가루가 있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역시 이 뼛가루가 중종이나 성종 부부의 것인지 단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이릉(二陵)의 치욕’이라 하는데요. 왜란 이후 윤안성(1542~1615)이 포로귀환을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사신단에게 지은 시가 있습니다.
“이릉의 송백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시인데요. 즉 ‘왜적이 훼손한 이릉(선릉과 정릉)에서는 소나무와 잣나무 가지가 자라지 않는다(二陵松柏不生枝)’는 회한에 가득찬 내용입니다.
인종의 아명이 ‘억명’이었던 이유
서삼릉 중 이번에 공개되는 인종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인종은 조선 임금 가운데 ‘최단 기간(8개월여) 재위’한 분입니다. 반면 세자위에는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여섯 살 때(1520) 세자 책봉 이후 25년 만인 1544년이 돼서야 왕위에 올랐거든요.
세자는 어려서부터 ‘요순이 될 소년’이라는 찬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백왕보다 더 높다는 인종의 성덕’은 피지도 못한 채 ‘8개월 천하’로 끝납니다. 인종의 공식 사인은 ‘지나친 효도’였습니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병에 걸리자 곡기를 끊었고요. 부왕이 승하하자(1544년 11월 15일) 인종은 뜰 아래 엎드려 엿새 동안이나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다섯 달 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았고요.
돌이킬 수 없이 쇠약해진 인종은 승하하기 전날(1545년 6월 29일) 마지막으로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1482~1519)의 관작을 복구하라”는 특명과 함께 “현량과(과거 없이 천거하는 제도)를 회복하라”고 지시한 겁니다. 인종은 이튿날(1545년 7월 1일) 승하했습니다.
“난 그냥 타 죽을란다”
인종의 죽음은 석연치 않았습니다. 사실 인종에게 어려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가 있었죠. 새어머니(문정왕후)입니다. 문정왕후는 친아들(명종·재위 1545~1567)을 옥좌에 올려놓기 위해 혈안이 됐습니다. 왕후의 오라비인 윤원로(?~1547)·윤원형(?~1565) 형제도 인종을 끊임없이 해코지했죠.
1543년(중종 38) 1월 7일 세자궁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연려실기술>은 “화재가 발생했을 때 세자의 침소가 밖에서 잠겨 있었다”고 고발했습니다. 이때 세자가 누구(문정왕후 측)의 짓인 줄 알고 부인(빈궁)을 깨워 “먼저 나가라”고 한 뒤 “조용히 타 죽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다 세자 처소를 찾은 귀인 정씨(1520~1566)의 손에 이끌려 현장을 빠져나왔다는 겁니다.
인종의 세자시절 스승인 하서 김인후(1510~1560)의 일화가 주목을 끄는데요. 1545년(인종 1) 4월 인종의 건강이 악화하자 김인후가 스승의 자격을 내세워 “약제의 처방을 의논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간청했답니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김인후가 어의의 처방을 살펴보겠다고 자청한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인종이 죽은 이유가 있어
문정왕후의 악행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하루는 인종에게 “이제 홀로 된 첩(문정왕후 본인)과 약한 아들(훗날 명종)이 어떻게 몸을 보전할 수 있겠느냐”고 괴롭혔습니다.
인종은 ‘햇볕이 쨍쨍 쬐는’ 무더운 날, 맨땅에 오랫동안 엎드려 왕후의 노여움을 풀어주었습니다. 문정왕후가 이질에 시달린 인종에게 상극인 닭죽을 바쳤고, 독이 든 떡을 먹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습니다.
마냥 가짜뉴스였을까요. 아닙니다. 1548년(명종 3) 8월 30일자 <명종실록>은 의미심장한 기사를 전합니다. 내관들끼리 한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관 김준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는 겁니다.
“인종께서 돌아가신 것은 김충후와 석씨 등의 소행이야.”
<명종실록>은 해괴한 말을 내뱉은 내관 김준을 추국했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맙니다. 인종의 죽음이 의문사였음을 시사해줍니다. 인종의 승하를 전한 <인종실록> 1545년 7월 1일자가 심금을 울립니다.
“인종이 승하한 날 궁벽한 곳에서 달려온 선비와 도성민까지 모두 제 부모를 잃은 듯 통곡했다. ‘이제야 태평시대가 열리겠다’고 기대했던 백성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삼릉에 묻힌 저마다의 사연
서삼릉에는 인종·인성왕후, 장경왕후, 철종·철인왕후 등 ‘삼릉’만 모신 게 아닙니다. 3기의 원(園)과 1묘,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7기, 태실 54기가 자리 잡고 있는데요.
이중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1612 ~1645)의 ‘소경원’이 눈에 띄죠.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1645)한 지 두 달 만에 병을 얻어 4일 만에 급서했는데요. <인조실록> 1645년 6월 27일자는 “세자의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면서 “약물에 중독된 것 같았다”고 전했습니다.
또 서삼릉에는 성종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1482)의 ‘회묘(懷墓)’도 조성돼 있어요.
원래 회묘는 경기 장단군에 있었습니다. 연산군 즉위 후 묘소를 서울 동대문 회기동으로 이장했고요.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직후 제헌왕후로 복위되면서 ‘회릉’으로 승격됐죠(3월 24일). 1506년에 중종반정 이후 다시 ‘회묘’로 격하됐고요. 그후 463년 만인 1969년 서삼릉으로 이장됐습니다.
조선왕가의 탯줄을 ‘날 일(日)’ 자로 묻어둔 일제
어디 그뿐인가요. 서삼릉 한편에 조성된 태실 54기 역시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한 뒤 전국의 길지를 선정해 그 태(태반과 탯줄)를 봉안하는 공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일제가 1929년 전국 곳곳의 길지(명당)에 봉안돼 있던 조선 왕실의 태실 54위를 경기 고양 서삼릉에 집단 이주시킨 겁니다. 일제는 특히 새롭게 조성한 왕과 왕자(공·옹주 포함)의 공간을 ‘한 일(一)’ 자 형태로 구분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일본을 상징하는 ‘날 일(日)’ 자 형태랍니다. 땅 밑도 마찬가집니다. 원형 모양의 시멘트 관에 태지석과 태항아리를 묻고 그 위를 날 일(日)자 형태의 시멘트 덮개를 씌웠습니다. 왕조의 만세 안녕을 기원하며 봉안한 조선왕가의 태를 죽음의 공간인 무덤(서삼릉)에 묻어버린 셈이라는군요. 어떻습니까. 서삼릉은 이렇게 허투루 넘길 수 없는 파란만장한 사연을 품고 있네요. 이참에 한번 가보기 바랍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I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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