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키의 웨딩드레스 만든 흑인 디자이너, 70년만에 빛 보다
역대 최대 규모 ‘앤 로 전시회’
1953년 9월 12일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서 존 F 케네디(36) 상원의원 당선자와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 기자 재클린 부비에르(24)의 결혼식이 열렸다. ‘미국 정가의 샛별’ 케네디의 결혼과 함께 하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신부의 웨딩드레스였다. 비스듬한 브이(V)자 네크라인(목둘레선)으로 마무리돼 눈길을 끌었던 이 드레스는 훗날 미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되는 재클린을 패션 아이콘의 반열에 올려준 기념비적 의상으로 평가받는다. 세기의 드레스를 손수 디자인하고도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의상 디자이너 앤 로(1898~1981)의 삶이 케네디와 재클린의 결혼 70주년을 맞아 다시 조명받고 있다.
델라웨어주 윈터터 박물관에서는 오는 9일 앤 로의 작품 전시회가 열린다. ‘앤 로-미국의 쿠튀리에(couturier·고급 맞춤 의상 디자이너)’라는 제목의 이 전시회에서는 그간 대중에 공개되지 않았던 그의 작품 40점이 선보인다. 그동안 열린 앤 로 작품 전시 중 최대 규모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전시는 미국 패션계가 여성 디자이너의 역할에 주목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앞서 오하이오주 캔턴에 있는 미국 영부인 도서관에서도 재클린의 삶을 조명한 전시 ‘카멜롯을 넘어’가 지난 5월 개막해 내년 4월까지 열린다. 이곳에서도 앤 로의 삶과 작품 세계가 집중 조명되고 있다. 케네디 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재클린의 웨딩드레스를 본뜬 복제품도 전시돼 있다.
로는 1898년 앨라배마에서 재봉사집 딸로 태어났다. 할머니는 백인 농장주와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할머니 어깨너머로 옷을 짓는 법을 익혔다. 열네 살에 결혼한 남편이 재봉 일을 그만두라고 강요하자 헤어진 뒤 아들 손을 잡고 플로리다로 이주해 웨딩드레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열아홉 살에는 패션의 본고장 뉴욕으로 가서 의상 학교인 세인트 테일러 디자이너 스쿨에 입학했다. 인종 분리 정책에 따라 백인 학생들과 분리된 채 수업을 받으며 학업을 마쳤다.
이후 플로리다에서 문을 연 의상실이 큰 성공을 거두자 뉴욕으로 돌아왔다. 니먼 마커스, 색스 피프스 애버뉴 등 고급 백화점에 그의 옷이 입점하면서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록펠러·루스벨트·듀폰 등 명문가 인사들을 고객으로 맞았고 재클린의 웨딩드레스도 짓게 됐다.
재클린의 웨딩드레스는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다. 주문을 받고 드레스를 만드는 데 꼬박 두 달이 걸렸지만,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배수관 폭발로 의상실이 물바다가 되면서 드레스를 입을 수 없게 됐다. 이에 로는 옷감과 장식물을 자기 돈으로 다시 구입했고, 닷새 동안 밤을 새우면서 가까스로 원래 드레스와 똑같이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드레스 납품으로 2200달러를 벌 수 있던 기회는 날아가고 오히려 700달러를 손해 보게 됐다. 그가 완성된 드레스를 케네디·재클린의 결혼식장에 전달하러 오자 현장 관계자들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뒷문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했고, 로는 “그럴 바에는 이 드레스를 갖고 돌아가겠다”고 맞서 결국 식장 정문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독창성과 예술미가 곁들여진 그의 옷은 큰 인기를 얻었지만 상당수 고객들은 흑인이 만든 옷이라는 이유를 들어 어떻게든 가격을 깎으려고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다. 1958년에는 의상실 경영을 책임지던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었다. 의상실 재정은 갈수록 악화됐고, 로는 1962년 불어난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다며 연방 국세청에 파산 신청을 했다. 그때 이름을 알리지 않은 누군가가 나서 빚을 모두 갚아줬다.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진 적은 없지만 당시 퍼스트레이디였던 재클린 케네디였을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는 등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로는 1972년 은퇴했고 9년 뒤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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