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에 얼룩진 내 젊은날들

2023. 9. 6.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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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하다] 들어가며2 : 손자 지용에게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지금도 할아버지 마음속엔 철모르는 어린 시절의 모습이 종종걸음 치고 있단다. 할아버지 어린 시절 할아버지 집 곁 산비탈 바위 동네는 촘촘히 작은 집들이 줄줄이 붙어 오르고 있었더란다. 그 비탈 집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외길 하나 나 있어, 이 길로 물차 똥차 청소차 짐차가 가까스로 드나들지 않았겠더냐.

할아버지 집, 할아버지네 가게는 비탈동네, 하루 종일 햇살 드는 삼거리 길목에 남향으로 자리잡았고, 우리 가게가 동네에 유일했기에 가게에는 가난한 동네 서민들의 하루 생활에 필요한 식료품과 땔감이 고루 갖추어져 있어야 했기에 할아버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마냥 바쁘셔야만 했다.

이처럼 할아버지는 꼬불꼬불 골목들이 이어나가는 산동네 중앙목에서 꼬마 시절을 보내며 세월을 따라 컸더란다. 할아버지 집 곁에는 촘촘히 붙어있는 지붕들 위로 불쑥 솟아오른, 꽤나 덩치가 큰 영금바위가 솟아나와 있었더라니, 깎아지른 바위의 남쪽 끝은 동네집들 지붕 위에 솟아오른 절벽이었고 나는 틈나는 대로 바위 위에서 연을 날렸더란다.

비탈 동네에는 큰 골목 작은 골목이 하도 많았기에 요리조리 골목길을 돌아내려야 조금 더 큰 길 아랫바닥에 닿을 수 있었고, 큰 길을 내리 걸어야 널따란 신작로 아스팔트 전차길에 닿았더란다. 전차길 곁에는 독립문이 있었고, 그 곁에는 개천을 끼고 영천시장이 양옆으로 붙어 있었다.

그 시절 전차는 독립문 양쪽 곁을 돌아서 다녔더라니. 어느 날엔가 할아버지도 무턱대고 독립문 돌문을 열고 무지 캄캄한 돌길을 돌아올라 독립문 꼭대기 바닥에 서서 천지사방 위아래를 둘려보기도 했더라니. 큰 길 한켠에는 높고 붉은 담벽으로 둘러쳐진 서대문 형무소가 있었고, 형무소 담벽 서북편에는 어린 할아버지가 동네 형들과 섞여 물장구를 치던 작은 연못 큰 연못이 나란히 붙어 있었고, 그 곁으로는 안산의 허리가 산등선을 따라 안산의 꼭두머리로 올라가고 있었구나.

안산 맞은편에는 숨차게 뻗어오르는 비탈 바위덩이산 인왕이 있었고, 인왕과 안산 사이에는 북으로 넘나드는 무악재 고갯길이 있지 않았더냐. 무악재를 넘으면 홍은동, 홍은동 지나 홍제동, 홍제동 고개를 넘으면 녹번동, 녹번동 지나면 구파발. 그러다가 끝내는 임진강 지나 판문점…. 그 시절 시내버스는 구파발까지만 다녔더란다.

할아버지는 소년 시절 6년 동안을 허름한 옷차림으로 허리엔 책과 도시락이 든 보자기를 둘러차고 골목골목을 빠져내려 영차전차종점 바닥 대로에 닿는대로 무악재 고개를 넘어 안산국민학교에 다녔구나. 공부를 마치고 다시 고갯길을 넘어 되돌아 올 땐 멀리서도 털털대며 달려오는 시내버스의 움직임을 보고도 그 시내버스의 차번호를 알아 맞추었더라니. 그 길에서 비도 맞고 눈도 맞고 바람과도 부딪쳐 가면서 지낸 6년.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뼈 빠지게 바쁜 중에도 주일이면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나를 데리고 독립문 교회에 다니셨단다. 할아버지는 일요일 저녁 예배에도, 수요일 동네 가정 예배에도 어머니를 따라 빠진 날이 없었지. 전쟁 중 독립문 성결교회는 전쟁의 폐허 위에 지어진 천막교회였구나.

그 천막교회 안에 할아버지가 있었고, 일찍부터 찬송가와 성경의 내용이 내 몸 내 마음 구석구석에 베어들지 않았겠냐. 특히 다윗과 솔로몬, 골리앗의 힘과 용기와 지혜는 어린 할아버지의 가슴을 휘어잡지 않았더냐.

때때로 긴 여름날 장맛비가 그쳐 할아버지가 어머니 따라 산길에 오르면 어머니는 인왕산 긴 바위벽를 타고 흘러내리는 바위틈 물로 빨래를 하셨고, 할아버지는 어머니 곁에 앉아 어머니가 디딜 돌계단의 모래를 손바닥과 입김으로 불어냈고, 날이면 날마다 헌 주전자에 산바위 약수를 담아 집으로 돌아왔더란다.

한마디만 더하고 가자. 우리집 가까이에 영금바위가 동네집 지붕들 위로 불쑥하니 튀어나와 있었더라고 하지 않았더냐. 때때로 내가 절벽 위 바위 끝에 붙어 앉아있노라면 늘 푸른 남산과 더불어 서편 서울 모습이 멀리멀리 한강 넘어까지 몽땅 바라보였더라니.

늘 푸른 남산 곁 서울역 중앙홀의 둥근 지붕을 지나 그 앞으로 치달아나가면 용산벌이 줄기차게 펼쳐져 있었고, 용산벌을 지나면 가물가물 굽어도는 아스라한 한강 줄기가 눈 안에 들어왔고, 그 건너 넓은 들 뒤에는 관악산과 청계산이 길고 넓은 지평선 위에 길게 누워 있었더란다.

그 위로는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하늘이 드넓은 창공을 휘덮고 있어 남산마저 작고 낮아보였더라니. 그래, 무한 창공 아래 서울의 넓은 들판! 그리고 영금바위 위에는 내가 앉아 있었다. 영금바위에 앉은 할아버지 몸 뒤 저만치에는 바위줄기를 오르는 인왕산 산성줄기가 정상을 향해 뻗어오르니 인왕의 정상도, 그 아랫녘 서울의 시내 쪽으로 비탈지어 뻗어내리는 바위판도 몽땅 영금바위 위 내 눈 안으로 들어왔더구나.

4.19 민중혁명과 이승만 12년 독재의 몰락

다시 한 번 조선땅의 역사를 들여다보자. 1945년 9월부터 점령자 미군과 소련이 이 땅 조선반도에 똬리를 틀고 앉아 식민제국 일본 대신 조선반도 인민의 생명과 시대를 관리하고 있었던 시절.

이들이 이 시대 초기의 조선 반도와 인민의 생명을 좌지우지해 가는 가운데 김일성은 1946년 초부터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와 더불어 전 산업의 국유화 등 반제 반봉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정책을 수행해 나가기 시작하니, 이에 불안한 북쪽의 고하(高下) 인민들이 사회주의 공산사회를 피해 삼팔선 넘어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고,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올라가지 않았더냐.

한편 38 이남은 해방 직전을 포함하여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인민세력이 서로 치고받으며 이합집산해 혼란한 가운데, 그들의 중심에는 중간지대를 대표하는 좌성향 여운형, 왼쪽에는 사회주의 인민세력을 대표하는 박헌영, 오른편에는 김구와 이승만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 위에는 미군정청과 이를 받쳐주는 친일 관료와 경찰이 그대로 남아 반공산주의 주력 이승만을 돕고 있지 않았겠더냐.

그렇게 세월이 흐르자 1947년 여운형은 헤화동 로터리에서 총 맞아 죽고, 미군정의 세에 쫒긴 박헌영은 같은 해 삼팔선을 넘어 김일성에게 갔고, 김구는 승산 없는 통일운동에만 집착해 있다가 정부수립 1년 만에 총 맞아 죽고, 일흔 살을 갓 넘은 미국통 이승만의 좌우에는 미군정청, 뒤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 앞에는 화려한 미래의 길이 열려 있었더라니 승승장구 이승만은 무엇이 두려웠겠는가.

이러한 가운데 미군정은 무소불위로 남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 열심이었을 것이로구나. 이 기간 유엔의 한반도 신탁통치 계획은 물 건너갔고, 농민의 요구와는 다르게 미군정청은 귀속농지를 단독으로 분배했고, 쌀값도 마음대로 정하여 농민의 분노를 샀다.

군정청은 조선총독부 시절 그 많은 공장과 귀속재산을 연고주의와 자금력과 정실 등에 의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인 개인들에게 시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장기연부를 상환조건으로 불하했고, 극우부터 극좌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진 신문들은 미군정이 등록제를 허가제로 바꾸자 정간 및 폐간되고 언론인들도 구속되었는데, 그 주된 탄압대상은 좌성향 신문과 지식인들이었더라니. 동시에 미군정청은 방송·영화·출판 등의 대중매체와 드라마·음악·만화·미술 등 여러 예술 장르의 문화를 온통 미국문화화해 나가지 않았더냐. 자본주의 소비문화!.

미군정 3년의 끝판, 이승만은 동대문에서 출마하여 제헌의회의 의원이 되었고, 제헌국회의 의장에 이어 국회의원들의 선거로 대통령으로 뽑힌 이승만은 1948년 8월 15일 광복의 날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선포하였구나. 이때 4.3사건의 여파로 수많은 인민이 제주도에 산다는 것만으로 죽임을 당하였기에 제주도는 제헌의회 선거에서 제외되었더구나.

1950년 6월 25일, 해방된 지 2년이 못되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냐. 북조선군이 일거에 서울을 점령한 뒤 남한땅 모두를 석권해 가며 전선을 낙동강으로 좁혀가자, 한반도를 잃을까 겁이 난 미국의 참전, 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의 육·수·공 험악한 힘으로 전선은 압록강가 초산과 혜산진까지 올라갔으니. 갑작스런 모택동의 중공군 참전으로 엄동설한에 연합군이 아래로 밀려내려와 38도선을 중심으로 한껏 밀고 당기다가 3년 전쟁이 끝났더구나. 이때 매일같이 미군기 B-29와 제트기 폭격으로 북한은 온통 쑥대밭이 되지 않았겠나 싶구나. 집이고 사람이고 산업이고 몽땅 말이다.

전쟁 3년. 포화 속에 봄이 네 번 지나갔고, 여름 가을 겨울이 세 번 흘러갔더구나. 아기들이 태어나고 늙은이는 죽으면서…. 그동안 남반도 북반도 거의 모든 시설이 파괴됐고, 피아 간의 어마어마한 인명피해, 어마어마한 산업피해, 어마어마한 시설피해. 이제 다시 들추어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전쟁 중 부산 정부시절. 이승만이 대통령 재선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마련한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국회를 골자로 마련한 정부의 개헌안이 다수의 야당 국회의원의 힘으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땃벌떼(정치깡패)·백골단·민족자결단 등의 폭력단체가 부산 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것을 방치했다.

비상계엄을 선포함과 동시에 다시금 정부안을 골간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로 하여금 국무위원의 불신임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경찰과 군인이 포위한 가운데 의원들의 기립투표의 방식으로 통과시킴으로써 이승만은 국민 모두의 보통선거로 대한민국의 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않았더냐.

그것만인가. 1954년 이승만이 3선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욕심으로 낸 개헌안이 투표 결과 국회의원 한 명 부족으로 부결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이를 뒤집어 국회의원 3분의 2에 못 미치는 소수점 이하를 지워버림으로써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1956년에도 연이어 3선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더라니. 역사는 이를 '사사오입' 치욕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구나.

비극도 함께 일어났더란다. 1956년 6월,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국을 질주하던 63세 야당 후보 신익희가 유세 중 호남선 열차에서 뇌일혈로 급서함으로 이승만이 3대 대통령으로 쉽게 당선되었고, 1960년 3월 15일에도 86살이 된 자유당 이승만은 경쟁자인 66살 조병옥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다시 4선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더라니. 덧붙여 해방 뒤부터 이승만 곁에 붙어 다니던 졸개 65살 이기붕도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는 사상초유의 엄청난 부정선거의 결과이지 않았더냐.

그리하여 선거날인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민혁명의 대열이 사흘 밤낮으로 마산 거리를 휩쓸었을 때, 사망 7명을 포함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다수의 참가자가 체포되어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고문당했던 반도 조선의 슬픈 역사.

4월 11일 17세 어린 나이로 행방불명됐던 고등학교 입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온몸이 밧줄에 묶이고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마산 부두 앞바다에 떠오르지 않았더냐. 이런 일이 우리 땅에서 경찰에 의해 일어나다니! 김주열 주검은 남반도의 폭탄이 되어 전국 이곳저곳을 강타해 가지 않았더냐. 울분에 찬 마산의 여고생들 모두가 부정선거 규탄대회에 나섰고, 대구에서도 광주에서도 부산에서도 또한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이지 아니었더냐. 당시의 신문들 사진을 보니 시위 군중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더구나.

연이어 4월 18에는 대학생과 민중이 거리를 휩쓸었고, 이날 저녁 무렵 학교로 퇴군하던 고려대 데모대열은 깡패의 무차별 폭력으로 거리에 나뒹굴거나 죽고…. 이 울분이 4월 19일로 이어져 거리의 구석구석은 대학생과 분노한 시민들이 가득 채웠고, 마침내 중앙청을 지나 경무대로 가는 길목 효자동 큰 거리에서 먼지와 최루탄 가스에 범벅이 된 채 총탄에 맞아 나뒹굴어야 했더라니!

피였다, 땀이었다, 먼지였다, 눈물이었다. 최루탄의 가스였다. 독재 수호의 총탄이었다. 울분에 찬 몸부림이었다. 피끓고 피맺힌 시민들의 용맹이었다. 오로지 '전진'뿐이었다. 그 안으로 독재의 총알이 비 오듯 날아들었다. 쓰러졌다. 고꾸라졌다. 젊디젊은 몸뚱이 속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더랬다. 거리의 아스팔트와 보도가 젊음의 붉은 피로 물들여져 가고 있었다.

마침내 교수들마저 핏발선 거리의 군중 속으로 들어가자 기어이 이승만은 손을 들고 말았구나. 이기붕은 그의 처와 함께 큰 아들 이강석의 총알에 맞아 죽었더란다. 그리고 큰 아들 이강석도 동생과 자기 자신을 쏘았고. 이강석은 육사를 갓 졸업한 젊디젊은 육군 소위이자 이승만의 양아들이지 않았더냐. 이로써 이승만의 12년 자유당 독재의 정권은 주저앉았고, 부정선거의 상징 자유당도 해체되고야 말았더라니. 숨찬 나날이었던 것 같구나. 역사에 길이 남을 기막힌 나날들!

그러나 이 땅에는 잘 정비되고 조직화되고 경험 많은 민중과 청년, 대학생의 조직화된 세력이 없었더라니. 온통 치고받고, 자기 주장, 자기 세력만 넓히려 들고… 시대에 길들여진 정당의 지도자들도 온통 자기세력 넓히기에만 분주했으니, 양물 먹은 지도자들에게 민중이 있었겠더냐. 그러기에 군부세력 군사혁명이 일어날 토양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더냐.

그러하니 4.19 혁명 덕으로 정치마당의 한가운데에 오른 민주당 정권이 그나마 터를 잡기도 전에 44살 육군 소장 박정희가 난데없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갓 일어선 민주당 정부를 총검과 탱크로 짓뭉기게 된 토양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더냐.

이때 할아버지는 18살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구나. 겉모양만은 멋졌지. 교복 흰 옷깃도 남보다 깔끔하고 단정했더랬지. 헌 군화를 신고 다녔더랬지. 아마도 헌 군화발이 유행이었던가? 그때 난 완전무장한 군인과 탱크 옆을 지나갈 때에도 조용하고 무덤덤했더랬지. 할아버지 생애 패기만만한 고등학교 시절의 한때였지 않았더냐.

박정희의 정권 18년, 전두환 정권 9년

반공을 국가다스림의 1호 지침으로 삼은 '반공 제일' 박정희 군사정권 시작의 역사! 4.19 민주대혁명 1년 뒤의 일이었으니 1961년 5월이런가. 이때부터 박정희 장기독재 군칼문화의 시작이었음이니 누가 가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더란 말이냐.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하늘만 빼고.

이때 나는 철부지 나이였고,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단다. 아무리 독서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흥미위주, 머리만의 만족이었기에 사회에 대한 인식은 맹탕이던 시절이었구나. 점수 위주의 고등학교 시절, 입시 위주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모두가 그런 상태로 흘러갔고 그 상태로 졸업하였단다. 대학교 입시는 낙방이었구나. 1년을 재수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붙지 않았더냐. 1965년 그해 입학식이 있기 전, 나는 수유리 4.19 기념탑 앞에 있었더란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장장 18년 간의 박정희 1인 군사문화 시대! 박정희 나이로 치면 44살부터 63살까지 창창한 나이었을 터이니, 돈이든 권력이든 힘만 있으면 무엇이든 이루어 낼 수 있는 10년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어도 박정희에게는 무한 창창한 나이였을 터이니. 이 나라 이 민족의 운명이런가. 그는 민족 민중의 문화를 키우기보다는 힘과 독재의 군칼 정치문화에 깊숙이 물들어 있었더구나. 그러하니 모든 걸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았겠냐. 유신독재! 밑으로는 그를 떠받치는 사람들만으로 둘러싸여 있었더라니.

부자든 가난한 서민이든 자본주의 속성 소비문화에만 익숙해 있었으니, 박정희 군사문화는 못내 끊어지지 않고 전두환의 또 다른 군사문화로 이어지는 게 당연하기도 하지 않았더냐. 그에 맞선 힘이 낱낱의 시민이거나 학생운동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니.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무슨 명목으로든 학생운동을 괴롭히고 할퀴고 짓이겨 묵살하려 했더라니. 그것이 박정희 자신은 물론 자본주의 남한사회의 기득권 문화를 지키는 길이라고 굳게 믿지 않았겠더냐. 여인 있는 비밀 연회로 자기를 위로하며….

결국은 자신의 운명을 못 믿어 유신의 철갑옷으로 중무장한 채 자신의 행위만이 이 땅을 살리는 유일한 정의(正義)라고 믿고 읊어댔더라니, 군인의 후예 박정희만의 독재정치 시대요 시기였기에. 피의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은 때마다 무너지고 갇히고 핍박받아야만 했더라니.

왜 민주시민운동 민주학생운동을 무소불위의 무력으로 탄압해야 했는가? 이것은 분명 폭력만이 박정희가 살아 갈 수 있는 유일 선택이기 때문 아니었겠나. 광인 독재자 히틀러도 죽기 전까지 자기를 믿은 것처럼.

그 시대 안에 작은 한 점처럼 내가 있었더란다. 나는 대학생이었고, 노동자였고, 가슴에 빨간 딱지가 붙은 죄수였고, 출판사 직원이었고, 대기업 노동조합 활동가였더란다. 그때 난 21살에서 35살 사이였고, 박정희가 총 맞아 죽을 때도, 전두환이 등장할 때도 그랬구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시대를 합하면 4.19 시대 1년을 빼도 물경 44년!

전두환이 권력을 내놓을 때인 1988년에 내 나이 마흔 넷이었지만, 내 몸 내 머리 안에는 시종 나이라는 개념 자체가 털끝만큼도 없었더란다. 나는 젊고 팽팽한 27년 세월을 군사 독재정치 하에서 마냥 긴장된 생활을 해야 했더라니. 나의 머릿속은 독재정치에 대한 무언의 저항으로 꽉 채워져 있었기에 나이가 들어설 여지가 없지 않았겠더냐.

이처럼 나는 이승만 12년 독재정치, 전두환의 군칼정치 아래에서 팔팔한 청춘 세월 모두를 한결같이 머리숙여 보내야 했더라니…. 이 동안도 조선의 아이들은 자라 어른이 되었고, 어른들은 늙고 병들어 죽고. 나도 박정희 1인의 군사문화의 옭매인 채 18년이란 긴긴 세월을 짓눌려 지내야 했더라니. 이어 9년 더 전두환의 정보정치 세계에서.

17살 1961년부터 36살 1979년에 끝난 박정희 군인독재에 이어 1988년에 끝난 전두환의 군사문화 시대에 갇혀 꽃다운 젊음과 패기 넘쳐야 할 청년시절, 꿈을 펼쳐 나아가야 할 인생 20~30대 멋지고 좋은 시절 모두를!

독재자 박정희의 찰라 간의 죽음은 독재의 끝이 아니었으니,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군칼 정치문화 9년(제4공화국 2년, 제5공화국 7년) 세월을 보태면 장장 27년! 이 땅엔 군사문화가 군림하여 조선 땅의 젊음들을 독재로 옭죄고 있었더라니. 노태우를 포함해 내가 살아온 44년은 제대로 된 민주주의 정치문화의 시대가 아니지 않았겠니. 사상과 이념과 젊음이 갇힌 시대에 나는 살아야 했더라니, 나라의 운명이 나에게도 운명!

미군정 3년에 이은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시대 12년,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문화의 시대 27년. 모두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군사문화의 시대인 건 매한가지 아니었겠냐. 이러한 시대에 수많은 민중이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억눌리고 죽임을 당하여야 했더라니. 4.19혁명의 시대 1년을 빼고는 결코 민중과 백성, 시민과 국민, 피 끓고 패기 넘치는 대학생과 청년의 시대는 아니지 않았더냐. 이 길고 긴 시대, 세월의 흐름 위에 점 하나인 내가 있었더라니. 그러니 말이다. 이 시대 이 시절이 나 다웠던가? 나의 대답은 결단코 '아니다'는 생각 하나 뿐이로구나.

이제와 뒤돌아보면 세월의 자그마한 점 하나인 나. 어린 시절 3년은 전쟁의 세월. 이후 정치학과에 학적을 둔 대학생으로 그리고 최전방 중부전선 금화지구 졸병생활을 합해 8년의 세월을 보냈다. 대학생활은 반(反)군사독재 민주화 학생운동의 흐름에 묻혀 지냈기에 영창에도 자주 드나들어야 했구나. 그렇지만 역사를 되세우려는 민주화 운동은 가야할 길이 너무도 멀고도 험하기에 졸업하기 직전부터 나 홀로 민중의 삶의 터전이자 일터로 흘러들어 용접 노동자가 되어 일했고, 강원도 도계 흥국탄광의 탄부가 되어 2000미터 지하막장 검은 세계의 후산부로서 탄을 캐었구나.

서울대 정치학과 동문으로 인해 난데없는 반공법 위반자로 낙인찍혀 무일푼의 방랑의 생활을 하던 중에 체포되어 백여 날을 넘게 남대문 경찰서와 서대문 형무소 미결감에서 지내다 1, 2, 3심 재판부 모두의 무죄 판정으로 구치소를 나와 생활했다. 빈손의 도망자 생활을 포함해 20개월은 내 인생의 고비요 굴욕이요 소모요 슬픔이었지만, 형사 배상금은 청구하지 않았구나. 치사해서, 치졸해 보여서.

그 후 최병문 학형의 소개로 광화문의 신구문화사와 이수억 동기동창의 추천으로 을지로5가 노벨출판사에서 번역 및 교정위원으로 일했고, 사회학과 후배 최재현의 추천으로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주최한 노동조합 중간간부 교육과정에 참여했고, 한국 노동운동의 본부인 한국노총과도 연이 닿을 듯했으나 그때 뿐, 다시 철물공장인 제세산업의 철공이 되어 일해야 하지 않았겠니.

다시 장명국 선생의 도움으로 대한전선 산하 7개 공장의 노동조합으로 이루어진 대한전선 본부 노동조합의 기획실장이 되어, 지부장 한달수를 도와 대한전선 그룹 본부 노동조합의 일상활동 모두를 총괄하며 8년의 세월을 보내던 중 결혼도 했지만, 집이 없어 해마다 이사를 다녀야 했더라니.

<계속>

▲ 2010년 천도교수운회관에서 열린 생활자기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신금호 선생 ⓒ손호철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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