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필의 귀거래사] 백로에 돌아보는 농정현장과 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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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면 백로라니 이젠 완연한 가을이다.
귀향 후 한동안은 두문불출하며 낡은 집을 수리하고 텃밭을 가꾸며 지냈다.
내 딴에는 농촌을 살리기 위해 힘에 겨운 일을 벌여놓고 용을 써보았지만 안타까웠던 것은 수요와 동떨어진 정책과 무질서한 집행, 현장과의 거리다.
집을 찾아온 농사짓는 친구에게 내년도 농업예산이 전년 대비 5.6%나 늘어난 18조3330억원으로 편성됐다고 자랑(?)했더니 본인과는 상관없다는 듯 시큰둥한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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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농과 상관없는 사업 많아
무질서한 집행·현장과의 거리
수요와 동떨어진 정책 아쉬워
한정 예산 효과적으로 쓰려면
대상별 맞춤 수단 마련 필요해
이틀 후면 백로라니 이젠 완연한 가을이다. 올해는 유난히 냉해와 가뭄·장마가 심하고 뜻밖에 병원 신세까지 지느라 한동안 집을 비웠는데도 벼는 용케 이삭이 패어 고개를 숙이고 잡초가 우거진 풀밭에서도 곡식이 익어가고 있으니 자연의 섭리가 오묘하다. 옛날부터 백로를 기준으로 기러기가 날아오고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며 새들이 겨울 먹이를 저장한다고 하니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때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장관 퇴임 다음 날 고향집으로 돌아왔으니 오늘이 만 7년째 되는 날이다. 귀향 후 한동안은 두문불출하며 낡은 집을 수리하고 텃밭을 가꾸며 지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대학에 강의도 나가고 경북도청의 자문관으로 농촌을 살리기 위한 나름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 후 주민 스스로가 살길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농촌살리기현장네트워크란 공부모임을 만들고, 농협의 역할에 대해 연구하고 지역특산물인 사과농사의 6차산업화를 위한 학교도 운영했다. 내 딴에는 농촌을 살리기 위해 힘에 겨운 일을 벌여놓고 용을 써보았지만 안타까웠던 것은 수요와 동떨어진 정책과 무질서한 집행, 현장과의 거리다.
며칠 전 발표된 내년도 농업예산만 해도 그렇다. 집을 찾아온 농사짓는 친구에게 내년도 농업예산이 전년 대비 5.6%나 늘어난 18조3330억원으로 편성됐다고 자랑(?)했더니 본인과는 상관없다는 듯 시큰둥한 반응이다. 국회 심의를 거쳐야겠지만 농림축산식품부는 식량안보와 농가소득 증대, 재해예방 등을 강화하고 농업의 미래성장산업화를 위해 신산업을 육성하는 데 중점 편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영세고령농 입장에서 보면 상관없는 사업이 많은 데다 집행 과정에서 끼리끼리 나눠 먹는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별 혜택을 보지 못하는 농가도 있을 것이다.
2022년 현재 우리나라 농가 102만2797호 중 호당 0.5㏊ 미만의 영세한 농가가 52.1%(53만3773호)나 되는 데다 70세 이상의 고령경영주가 45.4%(46만5254호)나 된다. 그러니 연간 농산물 판매액이 1000만원 미만인 농가가 65.1%(120만원 미만 18.1% 포함)나 되고 농업소득은 수년째 1000만원 전후에 정체돼 있다. 과거에 비해 정부의 보조 등 이전소득은 늘어났지만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아니어서 지원에 언제까지 의존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수년째 식량자급률 20%에 도시근로자 소득의 60% 수준인 농가소득을 방치하고 막대한 예산을 쓰면서 많은 조직과 인력이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정된 예산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역에 꼭 필요한 사업을 선정하고, 치밀한 계획을 수립해 부단히 확인 점검하고 평가해 보완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산업정책과 복지정책이 혼재한 농정의 경우 정책 대상을 구분해 유형별 특성에 맞는 정책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즉 산업적 육성 대상은 생산 기반 정비와 신기술 개발 보급, 수급 및 유통구조 개선, 재해보험 등 경영안정화 정책에 집중하고 영세고령농은 복지정책 대상에 포함해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면 어떨까. 아울러 방만한 공공부문의 역할을 재정비하고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자치단체와 유관기관, 마을에 이르기까지 연계·협력하도록 추진 체계와 일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흔히 말하는 스마트팜 이전에 경영체 데이터베이스(DB) 등 통계에 기초한 스마트농정이 필요한 것이다. 추운 겨울을 보낸 송나라의 늙은 농부가 봄이 돼 싱싱한 미나리가 너무 좋아 임금에게 바치려 했다는 ‘헌근지성(獻芹之誠)’처럼 7년여 현장에서 느낀 걱정을 마음으로 받아주면 좋겠다.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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