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 추상화가의 강렬한 흑백 드로잉
흑백 명암이 강렬한 드로잉 위에 작가는 떠오르는 생각의 파편을 휘갈겨 썼다. 자화상인 듯 아닌 듯 흔들리는 여인의 얼굴 옆에 이런 문구가 보인다. “당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에 안 들기에 도와줄 수 없겠다.” 컴컴한 어둠 속, 웅크린 태아의 형상을 닮은 그림엔 “때가 되면 해가 뜰까… 과연 내게 때가 오긴 할까?”라고 끄적였다.
38년 전 45세로 세상을 떠난 추상화가 최욱경(1940~1985)의 ‘색(色) 없는’ 전시가 부산에서 열리고 있다. 국제갤러리가 부산점에서 처음 여는 최욱경 개인전 ‘낯설은 얼굴들처럼’이다. 서울대 회화과 졸업 후 1965년 미국 유학을 떠나 치열하게 화법을 실험하고 정체성을 고민한 시기의 흑백 드로잉과 판화 29점, 크로키 8점이 나왔다. 화려한 색채 추상으로 그를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날것의 감동을 준다.
최욱경은 언어를 다루는 시인이기도 했다. 전시 제목은 그가 1972년 첫 번째 미국 체류를 마치고 잠시 한국에 돌아와 활동할 때 펴낸 시집 제목에서 가져왔다. 그가 “뿌리를 흔드는 경험”이라 표현한 유학 시절 쓴 시 45편과 삽화 16점으로 구성됐다. 이 중 ‘습작’ ‘실험’ 등 삽화 6점이 이번 전시에 걸렸다. 시집은 절판됐으나 전시장에서 개정판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영민한 작가는 한국과 미국 어디에서도 편치 않았다. ‘나는 미국인인가?’라고 묻는 드로잉 작품에선 머나먼 땅에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유학 시절 그는 조지아 오키프, 윌렘 드 쿠닝 등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화려한 색채, 대범한 필치의 최욱경 그림은 차분한 색조 작품이 지배한 1970년대 한국 화단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여성 작가란 얌전한 그림을 그리는 ‘규수 화가’여야 했던 시절, 최욱경은 이단아였다.
미국에서는 이방인으로 지내야 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겉돌 수밖에 없었던 그는 1985년 7월 여의도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숨진다. ‘나에게도 때가 올까’ 회의하면서도 끊임없이 분투하며 자기만의 색과 형태를 밀고 나간 그의 작품은 훗날 재평가되며 불멸의 삶을 얻었다. 2년 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20세기와 21세기 세계 여성 추상작가를 조명한 대규모 기획전에 최욱경 작품 석 점이 당당히 걸렸다. 전시는 10월 2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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