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풍경] 설악산 보러 금강산에… 1시간 오르니 녹음의 파도 위에 울산바위가
편집자주
느린 만큼 보이는 사람, 마을, 자연. 매주 수요일 여행 감성을 자극하는 풍경을 찾아갑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부분만 보고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근시안적 행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속담이다. 자연 감상법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멀찍이 떨어져야 진면목이 보인다. 설악산 울산바위도 그렇다. 속초 노학동 도로변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설악산책’ 2층 카페에 들어서면 서쪽으로 난 통창으로 설악산 능선과 울산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진다. 이곳뿐만 아니다. 설악관광단지의 대형 리조트는 물론이고 새로 생긴 카페나 식당은 어김없이 ‘울산바위 뷰’를 자랑으로 내세운다.
울산바위 보려고 금강산에 간다?
해발 873m 울산바위는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바위 능선이다. 6개 봉우리에 둘레가 4㎞다. 압도적인 위용에 자연이 빚은 예술성까지 더해 어디서 보든 기암절벽의 극치를 자랑한다. 오죽하면 인제와 연결되는 미시령터널 입구의 쉼터 명칭이 ‘울산바위 촬영휴게소’일까.
설악산에 왜 울산바위일까? 세 가지 설이 전해진다. 거대한 울타리처럼 보여 그렇게 불렀다는 설, 울음 우는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어쩌면 산 울음이 아니라 바라보는 이들에게 눈물이 맺히도록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 번째 전설은 가장 흥미롭고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조물주가 1만2,000봉 멋진 경관을 빚으려 전국의 잘생긴 바위를 금강산으로 불러들였다. 울산에 있던 큰 바위도 서둘러 길을 떠났지만 워낙 덩치가 크고 무거워 금강산을 코앞에 두고 잠시 쉬다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미시령에서 숨을 돌리는 사이 금강산 경관이 모두 완성돼 들어앉을 자리가 없어졌다. 고향으로 돌아갈 체면이 없어진 울산바위가 그대로 설악산에 주저앉고 말았다는 얘기다.
일대를 모두 설악산으로 알고 있지만, 오래전에는 미시령을 기준으로 북측을 금강산 권역으로 분류했다. 속초와 고성도 바로 이 고갯길을 경계로 삼고 있다. 고성군 토성면 신선봉(1,212m)은 금강산 남쪽 끝자락에 해당한다. 신선봉 중턱 널찍한 바위 봉우리인 성인대(신선대)는 또 다른 방향에서 울산바위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약 4.5km 화암사숲길을 따라 걸으면 닿을 수 있다.
화암사 제1주차장(3,000원)을 통과해 조금 더 오르면 2주차장이다. 그 사이에 위치한 일주문이 이곳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설악산이 아닌 ‘금강산화암사’ 현판이 선명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널찍한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걸으면 왼편에 화암사숲길 표지판과 수바위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빼어날 수(秀) 자를 앞세웠으니 한마디로 잘생긴 바위라는 뜻인데, 화암사의 상징이나 마찬가지다.
화암사는 신라 36대 혜공왕 때인 769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수바위는 사찰에서 보면 더욱 웅장하게 보인다. 윗면 커다란 웅덩이에 항상 물이 고여 있어 ‘수(水)바위’라 부르기도 하는데, 화암사 전설은 빼어난 생김새와 더불어 이 바위에 대한 고마움을 담고 있다.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은 항상 시주에 어려움이 많았다. 어느 날 두 스님의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있으니, 끼니 때마다 지팡이로 세 번 흔들라고 말한다. 다음 날 아침 바위로 달려가 그대로 했더니 두 사람 먹을 쌀이 쏟아져 나와 스님은 식량 걱정 없이 수도에 정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불가의 전설은 욕심을 경계하라 일깨운다. 어느 날 이 사실을 안 객승이 여섯 번이면 4인분의 쌀을 얻지 않을까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다. 예상하는 대로 그후부터 수바위에서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다. 화암사(禾岩寺)는 바로 쌀이 나오는 바위, 즉 수바위에서 비롯한 명칭이다.
화암사숲길은 수바위 안내판에서 시작된다. ‘숲길’이라는 푸근한 명칭과 달리 바로 오르막이다. 가파른 데다 노면도 고르지 않다. 수바위 아래서 한숨 돌리면 1.2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거리가 짧다고 무리하면 안 된다. 아주 가파르지 않지만 길은 꾸준히 오르막이다. 중턱 산등성이 쉼터에 다다르면 왼편으로 너른 들과 바다가 보인다. 아직 햇살이 따갑고 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데 들판은 이미 누렇게 물들고 있다. 가을의 문턱임을 실감한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햇볕이 부서지는 짧은 평지를 지나면 목적지까지 다시 오르막이 이어진다. 다행이라면 이 지점부터 소나무보다 참나무 위주의 활엽수가 풍성하게 그늘을 드리운다는 점이다. 이제야 제법 숲길의 면모를 갖춘 셈이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능선에 다다르면 ‘신선대(성인대)’ 안내판 뒤로 잘생긴 바위가 모여 작은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아주 먼 옛날 천상의 신선들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뜻이라고도 하고 곧추선 바위가 성인(聖人)의 면모를 지녔다고 해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갈라진 2개 바위 사이로 토성면의 너른 들판과 동해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주차장에서 이곳까지 쉬엄쉬엄 1시간가량 걸렸다.
한껏 기대하고 올랐는데 정작 울산바위는 보이지 않는다. 능선 탐방로에서 샛길이 하나 이어지는데 ‘경고’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정식 등산로가 아니니 출입을 자제해 달라는 내용이다. 돌풍이 불면 실족 사고 위험이 크니 특히 조심하라는 글귀도 보인다. 조심스럽게 좁은 통로로 몇 발짝을 내디디니 널찍한 바위 능선이 나타나고, 그 너머로 울산바위의 웅장한 자태가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 기암괴석 아래로 흘러내린 산줄기가 허리춤에서 흘러내린 한복 주름처럼 넓고 깊고 우아하다.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자연이다. 짙은 녹음이 이러할진대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면 또 어떨까.
산자락 아래서 왼편으로 눈을 돌리면 설악지구 관광단지와 속초 시내, 고성 토성면 들판과 푸른 바다가 파노라마로 이어진다. 지나온 수바위는 녹음의 바다에 섬처럼 떠 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장관이고 그림이다. 대개는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지만, 너럭바위에 비스듬하게 누워 산과 바다와 들판과 하늘을 하염없이 응시하는 이들도 보인다. 감탄사는 짧고 여운은 길게 남는다
이런 경관이 입소문을 타면서 요즘은 젊은 등산객도 많이 찾는다. 신선대 바위 능선은 약 300m가량 이어진다. 대체로 평평하고 폭이 넓지만 사진 욕심에 가장자리로 이동하는 건 자제해야 한다. 안내판 경고대로 바람이 심한 날에는 아예 올라가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하산은 왔던 길 대신 화암사 방향으로 잡았다. 절까지 약 2km로 오를 때보다 조금 에두르는 길이다. 그래도 경사가 만만치 않다. 절반은 걷기 편한 숲길이지만 절반은 가파른 내리막이다. 다행히 올라갈 때보다 그늘이 많고 어느 정도 내려오면 탐방로 좌우로 계곡 물소리가 시원하다. 화암사를 500m 남긴 지점부터는 청량한 계곡과 나란히 내려간다.
화암사 전각에서 신라 고찰의 면모를 찾기는 힘들다. 절은 한국전쟁 때 거의 파괴돼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오다 1990년대 들어 오늘날의 규모로 중창됐다. 기와지붕 위에 얹힌 듯한 수바위의 자태만은 옛 모습 그대로 절간의 전설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깔끔한 전각 처마 뒤로 멀리 속초 시내 풍경이 아른거린다.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미시령옛길
여유로운 나들이길이라면 미시령옛길로 차를 몰아도 괜찮겠다. 인제군 북면 용대리와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를 잇는 고갯길이다. 미시령(826m)은 예부터 진부령·대간령·대관령 등과 함께 관동지역에서 백두대간을 넘는 주요 교통로였다.
이 길은 길고 험준해 열고 닫기를 거듭했다. 고려 때 폐했다가 조선 성종 24년(1493) 다시 개척해 미시파령(彌時坡嶺)으로 불렸고, 조선 말에 다시 폐쇄됐다 1960년경 재개통됐다. 1971년 인제와 양양을 잇는 한계령 도로가 개설되면서 이용하는 차량은 줄었고, 2007년 미시령터널(3.69㎞)이 뚫리고 근래에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한 후부터는 단풍철을 제외하면 호젓한 도로로 남았다. 덕분에 고갯마루 주변은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정상에 있던 휴게소는 설악산국립공원 미시령탐방안내소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훼손됐던 주변 산자락은 자연 상태로 되돌리는 중이다.
탐방안내소에서 도로 건너 뒤편에 미시령 표석이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이식(1584~1647)이라는 인물이 지은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한 발 삐끗하면 곧바로 푸른 바다, 손을 들면 잡히나니 푸른 구름 / 처음에는 디딜 땅도 없을 듯 겁나더니, 하늘까지 오를 욕심 다시금 샘솟누나.”
안내소에서 보는 전망은 지금도 여전하다. 도로는 계곡 남쪽 산자락을 따라 구불구불 완만하게 산등성이로 기어오르고, 맞은편에는 신선대 너럭바위가 하얀 이마를 드러내고 있다. 그사이로 설악산 자락 리조트며 속초 시내 풍경, 푸르른 동해가 풍경화처럼 걸린다.
고성(강원)=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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