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아름다움에 머무르기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책 ‘아름다움의 구원’에 ‘아름다움에 머무르기’라는 장이 있다. 그는 “머무르라 너는 참 아름답구나”로 글을 연다. 아름다움이 머물러주길 희망하는 말이다. 그럼 아름다움은 무엇이며, 머무른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필자는 이 대목에서 ‘아름다움’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그냥 보기에 좋은 것이 아름다운 것인지? 아니면 보기와 더불어 진정성의 의미와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 아름다움인지? 등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지금 우리에겐 아름다움이 혹여 이익과 관련된 것에 절대적 가치,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은 아닌지 상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옛 선조들은 소리를 듣고도 상대의 감정을 알 수 있는 관계를 ‘지음(知音)’이라 했다. 이는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악상(樂想)을 이해해 준 종자기(鍾子期)가 죽은 후 그 소리를 아는 자가 없다 하여 거문고의 줄을 끊어 버렸다는 데서 온 말이다.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소리의 무한한 만큼 두터운 신뢰를 말한다. 소리의 아름다움에 머무르기는 결국 이해의 폭에서 나오며, 이는 신뢰의 깊이만큼 느끼는 것이다.
이외수의 책 ‘벽오금학도’에서도 아름다움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우주의 본질적 구성요소가 바로 아름다움 그 자체이니라. 풀과 나무들은 아름답고자 하는 소망에 의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만들고 씨앗을 싹 틔우는 것이니라.” 삶의 전 과정이 아름다움이라, 아름다움이 과정임을 이야기한 것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책 ‘음악혐오’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모든 음악은 밤에 연주되어야만 했다. 연주자는 하늘과 땅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고 바람은 시원하고 달은 청명할 때,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 차분하고 느린 맥박으로 야음을 누릴 줄 알아야 했다.… 가장 먼저 악공은 겸허한 자세로 침묵 속에서 곡조를 떠올렸다. 그는 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어둠 쪽으로 돌렸다. 그제야 악공의 손가락이 유려하게 흐르며 춤추는 가운데 악기의 심부에서 음악이 올라올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심려를 기울이는데 그 소리가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아름다움에 머무르기는 결국 기다림에서 이미 시작되며, 머무름인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아름다움은 ‘상대를 바라보는 나의 눈길이 즐겁고, 상대의 소리를 듣는 나의 귀가 즐겁다’고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미래의 투자가치 또는 투기가 일어나고 있는 지금의 현상에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인지…. 작금의 시대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너무 멀리 있는 느낌이다. 아름다움은 거리두기가 중요하다. 적당히 거리를 두면 아름다움은 증폭된다. 자신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두기를 하며 찾아가는 과정이 아름다움이요, 머물기의 시작이다.
아름다움을 삶의 중심에 앉히면 행복해진다. 소중하고 짧은 행복의 연속이 결국 아름다움의 연속으로 이어지며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신뢰를 기반으로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다. 이 신뢰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름다움의 시작이기에 우리는 신뢰를 중요시해야 한다. 과정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과정 전체를 느끼고 즐기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의 삶이 아름다움에 머무른다.
지금 현실은 무서울 만큼 치열하다.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고 죽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위기 속에 살고 있지만, 진정한 적은 내 마음속에 있다. 상대를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이 시간은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이 진정되고 모든 것이 침전되었을 때 비로소 보인다.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 있고 난 뒤에야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한다. 혼란한 마음을 먼저 정제해야 한다. 그 뒤 나타나는 아름다움은 신뢰의 회복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과정을 이해하고 때를 기다려 실천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이는 지켜내야 할 것을 지키는 힘이며, 일상을 바르게 바라보는 힘에서 시작된다. 현재를 이해하는 힘의 무게만큼 미래는 밝아질 것이며, 아름다움은 밝은 미소로 우리를 반길 것이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