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소련 지시로 남한서 폭동… 자유민주 정부 수립 위해 유엔 설득하다
2차 세계대전 뒤 한반도 문제가 다루어진 첫 국제 회의는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①한국임시정부의 설립, ②미군과 소련군의 ‘공동위원회’의 설치, ③5년 기한 강대국들의 한국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강대국들이 신탁 통치를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남한 주민 모두가 반대에 나섰다. 좌익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조선공산당은 “만일에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사실이라고 하면, 우리는 절대로 반대한다. 5년은커녕 5개월간의 신탁통치라도 우리는 절대로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평양을 찾아 북한의 실질적 통치자인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이 시티코프의 지시를 받고 내려온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은 신탁통치 지지를 천명했다. 좌익은 곧바로 찬탁 운동에 나섰고, 이 일로 좌우익이 뚜렷이 갈라졌다. 이런 현실에 막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제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1946년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이승만은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또는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자”고 연설했다. 이 발언으로 ‘남한 정부 수립’이 중심적 정치 의제로 떠올랐다.
모두 통일 조국을 얘기하는 상황에서 남한 정부를 내세운 ‘정읍 발언’은 정치 지도자로선 무모한 모험이었다. 노련한 정치가인 그로 하여금 그런 정치적 위험을 안도록 한 것은 소련의 위협에 대한 그의 통찰이었다. 그는 조선과 국경을 공유한 소련이 조선에 대한 상시적 위협임을 늘 인식했다. 그의 국제정치적 계산에선 소련의 위협에 대한 대처가 거의 언제나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당시 세계 지도자들 가운데에선 보기 드물게, 이승만은 제정 러시아와 소비에트 러시아를 아울러 경험했다. 그는 만민공동회에서 시작되어 활발해진 사회 개혁이 고종의 반동 정치로 짓밟히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끼친 부정적 영향을 절감했다. 그리고 1933년 7월에 모스크바를 찾았다가 추방된 경험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본질을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제정 러시아의 중세적 전통에 전체주의적 세계관이 덧씌워진 사회임을 그는 깊이 인식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있기 넉 달 전에, 소련 주재 미국 부대사 조지 케넌은 그의 ‘긴 전보(Long Telegram)’에서 같은 진단을 내렸다. “세계적 사안에 대한 크렘린의 정신병적 견해의 밑바닥엔 전통적이고 본능적인 불안감이 있다… (러시아 사람들은) 경쟁적 권력과 협약이나 타협을 한 적 없이, 오직 그것의 완전한 파멸을 노리는 참을성이 있지만 치명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안전을 추구하는 것을 배워왔다.” 케넌의 진단은 지금의 중국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얄타 협정에 조선에 관한 비밀 협약이 있다는 그의 폭로가 남한에 미군이 진주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앞에서 살핀 바 있다. 자연히, 그는 남한이 한반도 전부를 수복하는 일에서 전진기지 역할을 하리라고 여겼다.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세워지면, 북한의 전체주의 정부를 압도하게 되어, 궁극적으로는 남한의 주도로 통일된 나라가 나오리라고 보았다. “다만 한 도(道)나 군(郡)이라도 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은 그런 인식에서 나온 전략이었다.
물론 미국으로선 소련과 협상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서 한국 문제가 풀릴 수는 없다고 이승만은 확신했다. 그는 자유주의 국가와 전체주의 국가가 협상을 통해서 합리적 방안을 도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여러 나라들의 비극적 운명에서 확인했다.
게다가 한반도 북부엔 이미 소련의 위성국가가 선 터였다. 이제 소련은 한반도 남부도 노리고 있었다. 그런 노림을 막으려면, 남한에 정부가 빨리 서야 했다. 이런 절박함이 ‘정읍 발언’을 낳았다.
1946년 9월 하순에 좌익 노동조합(전평)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9월 23일에 부산지구 철도노동자의 파업으로 시작된 총파업은 이내 전국의 모든 기간 산업 노조들로 확산되었다. 출판노조까지 파업에 가담해서, 신문과 잡지가 나오지 않았다.
이 총파업은 평양에서 꾸민 공작이었다. 남한 사회가 차츰 안정되고 공산당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박헌영은 미군정에 적대적인 ‘신전술’을 시티코프에게 건의했다. 시티코프는 그런 건의를 받아들여 총파업 계획을 승인했다. 그리고 필요한 자금을 남한으로 내려 보냈다.
좌익의 도발적 총파업에 이승만은 빠르게 대응했다. 총파업의 움직임을 감지하자, 그는 바로 하지 사령관을 만나 대책을 협의했다. 이어 우익 노조인 대한노총의 위원장에 취임하고 파업에 대한 실질적 대응에 나섰다. 9월 30일 경찰과 우익 단체 회원들은 서울 철도 노동자들의 농성장에 들어가서 그들을 해산시키고 철도의 운행을 재개했다. 이 일을 계기로 총파업이 잦아들었다.
‘9월 총파업’이 실패하자, 시티코프는 박헌영에게 도시 폭동을 일으키라고 지시하고 막대한 자금을 내려 보냈다. 폭동은 10월 1일에 대구에서 먼저 일어났다. 부녀자들을 앞세운 폭도들은 대구역 파출소로 몰려가서 포위하고 공격했다. 위협을 느낀 경찰의 발포로 한 사람이 죽었다. 이튿날 불어난 시위대는 대구경찰서를 점령하고 무기고를 열어 무장한 다음 경찰관들과 가족들을 살해했다.
대구 폭동은 빠르게 남한 전역으로 퍼졌다. 평양의 소련군 사령부가 지휘하고 막대한 자금을 제공했으므로, 폭동은 유난히 격렬했다. 그래서 인명 피해가 엄청났고 재산 피해도 막대했다. 결국 이 폭동은 12월까지 이어졌다.
좌익의 파업과 폭동은 미군정청 지휘부로 하여금 소련이 한반도에서 이루려는 목표에 대해 새롭게 살피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북한에 독자적 정권이 세워졌고 북한군이 빠르게 강화된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를 진지하게 성찰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남한에 자유주의 정권이 한시라도 빨리 서야 한다고 주장한 이승만의 선견지명이 부각되었다.
마침 1946년 10월에 뉴욕에서 국제연합(UN) 총회가 열렸다. 이승만은 임영신을 자신이 주도하던 민주의원 대표 자격으로 UN에 파견했다. 이어 11월엔 UN 총회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기 위해 자신이 미국을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70여 개의 정당 및 사회 단체들이 그를 ‘한국 민족 대표’ 자격으로 미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모금에 나섰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회에선 무려 1만3000명이 모금에 참여했다.
미국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UN이 한국 문제를 다루도록 하려고 활동했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의 극동국장 존 카터 빈슨트는 소련의 첩자여서, 이승만의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한국 문제의 UN 총회 상정이 무산되자,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친구들로 ‘전략 회의’를 구성하고서 UN의 주재를 통한 ‘남한정부 수립계획’을 세워서 미국 국무부에 제출했다.
이승만의 제안은 미국 정부 안에서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고 꽉 막혀서 나아가지 못하는 한국 문제에 대한 창의적 제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쉽게도, 소련의 이익을 앞세우는 빈슨트의 방해로 이 제안은 채택되지 못했다. 대신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시도했다. 그러나 1947년 5월에 열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양측의 입장 차이가 여전히 크다는 것을 확인하고 끝났다.
마침내 1947년 9월에 조지 마셜 미국 국무장관은 UN 총회에 한국 문제를 다루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소련은 거세게 반대했다. 그래도 10월에 총회의 제1정치위원회는 한국의 선거를 감시할 UN 한국임시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한다는 미국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11월엔 총회가 제1정치위원회의 결의안을 찬성 43표, 반대 0표, 기권 6표로 채택했다.
한국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UN으로 이관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성취였다. 미국 정부도 결국 인정한 것처럼, 미국과 소련 사이의 협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이 주도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만들어진 미로에서 한국 문제가 벗어나는 데 두 해가 걸린 것이었다.
한국 문제의 UN 이관은 남한에 세워질 국가의 정통성 문제도 미리 해결했다. 두 강대국들의 협상을 통해서 나온 국가는 정통성에서 UN의 주관 아래 세워진 국가에 크게 못 미친다.
이런 성취가 중요한 만큼 이승만이 맞은 어려움도 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남한의 실질적 군주였던 하지 사령관과 미 국무부 담당 국장의 노골적 방해를 받았고 한때는 실질적으로 자택 연금을 당했다. 마지막 단계에선 동지였던 김구가 ‘미군과 소련군의 동시철군’이라는 소련 주장을 지지하면서 자유주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날벼락을 맞았다. 잇달아 나오는 어려움들을 끝내 뚫고서, 그는 UN을 통한 국가 수립이라는 이정표를 우뚝 세웠다.
[이승만과 대립했던 하지]
미국 이익 중시한 관료… 미·소 공동위 활성화 위해 좌익 불법 활동도 외면
하지 미 군정 사령관은 본질적으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관료였다. 그의 임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활성화였고, 그 임무를 위해 그는 북한의 소련군 사령부와 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래서 좌익의 불법적 활동들은 어지간하면 외면했고, 박헌영과 같은 공산당 지도자들도 체포하는 대신 북한으로 탈출하도록 유도했다.
이승만은 한국이 소련에 장악되는 것을 막아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았다. 무엇보다도, 이미 강력해진 북한군의 침공에 맞설 군대를 건설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조만간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싸움에서 아무런 권력이 없는 이승만이 이겨서 대한민국이 섰다는 사실은 그의 인품과 지도력에 관해서 뜻 깊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하지는 태평양전쟁에서 공을 세운 군인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준비 없이 떠맡은 남한 점령 임무를 무난히 수행했다. 아쉽게도, 그는 끝내 이승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조국 미국이 이승만 같은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나라였기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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