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303> 세상일에 귀 닫고 입 닫고 살고자 한 여말선초의 박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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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아걸어 속된 무리는 만나지 않고(杜門終下接庸流·두문종하접용류)/ 청산만 내 누대로 들어오게 허용한다네.
위 시는 이색의 문인인 여말선초의 문사 박의중(朴宜中·1337~1403)이 쓴 '척약재 김구용의 시운에 차운하여(次金若齋九容韻·차김약재구용운)'로, 그의 문집인 '정재집(貞齋集)'에 들어있다.
더는 복잡한 세상일에 끼이지 않고 싶다.
그런 시기에 그가 벗할 대상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청산(靑山)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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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아걸어 속된 무리는 만나지 않고(杜門終下接庸流·두문종하접용류)/ 청산만 내 누대로 들어오게 허용한다네.(只許靑山入我樓·지허청산입아루)/ 즐거우면 읊고 피곤하면 잠을 자니(樂便吟哦慵便睡·낙편음아용편수)/ 그 밖의 다른 일은 마음에 두지 않는다네.(更無他事到心頭·갱무타사도심두)
위 시는 이색의 문인인 여말선초의 문사 박의중(朴宜中·1337~1403)이 쓴 ‘척약재 김구용의 시운에 차운하여(次金若齋九容韻·차김약재구용운)’로, 그의 문집인 ‘정재집(貞齋集)’에 들어있다.
세상의 일에서 벗어나고자 문을 잠그고 두문불출한다. 더는 복잡한 세상일에 끼이지 않고 싶다. 마음 내키면 노래하고 잠이 오면 잠잘 뿐이다. 바깥일에 마음 두지 않는다. 박의중은 고려 말 예문관제학 겸 대사성을 지냈고, 조선에 들어와 1392년(태조 1) ‘고려사(高麗史)’를 수찬할 때 참여한 뒤, 관직에 더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 이방원이 고위직을 제안했지만, 나아가지 않고 몸을 숨긴 선비였다. 문장이 뛰어나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大智國師·1328~1390) 찬영의 탑비 비문을 짓기도 했다.
어느 시대인들 혼돈스럽지 않은 적이 있던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볼모로 잡혀가며 읊은 시조에도 “…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고 하였다. 그렇다. 시절은 항상 하(매우) 수상(殊常)하였다. 박의중이 살던 시기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기에 그가 벗할 대상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청산(靑山)뿐이었다. 세상일 들어봐야 이 말 다르고, 저 말 다르다. 당시 선비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의(義)’였다.
봉사 차원이지만 서당을 열어놓고 있다 보니 많은 사람을 만난다. 우리는 농담 삼아 “중원에서 설치는 이들은 어중간한 사람이지만, 진정한 고수는 강호에 숨어 산다”는 말을 한다. 지리산에 살다 보니 이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골짜기에서 평범하게 사는 분이지만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고수라는 생각이 드는 분이 있다. 필자와 어제 자리를 함께한 어르신도 그렇다. 박의중을 지금 만난다면 그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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