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강원 노포 탐방] 57. 홍천 성화전파사
중학생 시절 과학·전기원리 관심
기술 배우려 홀로 서울 유학행
결혼 후 홍천 귀향 1984년 개업
하루 10~20건 수리 의뢰 ‘성업’
업체별 AS 센터 운영 등 영향
손님 발길 줄어도 출장 전문
검증된 실력으로 자리 지켜내
낯선 이름, ‘전파사’. 요즘 전자제품은 각 회사별로 AS센터가 운영되고 있어 전파사로 고장난 전자제품을 들고 찾아갈 일이 없다. 하지만 1980~1990년대만 해도 하루에 10~20건씩 수리가 있었고, 홍천읍내에 전파사가 20곳이 넘을 정도로 호황을 이루던 시절도 있었다.
이유상(70) 성화전파사 대표는 지금으로부터 39년 전인 1984년에 홍천 읍내에 전파사를 열었다. 31살에 젊은 사장님이 됐다. 전자제품 수리기사로 몇몇 가게에서 고용돼 일하다가 결혼 후 고향인 홍천에 자리잡고, 성화전파사를 시작했다.
초기엔 성업을 이뤄 하루에 10~20건씩 꾸준히 수리일이 들어왔다. 지금은 한 달에 몇 건 안되지만 그때만 해도 수리하는 일에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현재는 이 대표가 전기 기술을 배운 덕에 넓은 면적의 홍천 곳곳을 다니며 가정 내 전기관련 각종 고장을 수리한다.
홍천에서 나고 자란 이 대표는 1973년 중학교 졸업 후 전기기술을 배우기 위해 서울 중앙TV기술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전기이론부터 실습까지 6개월간의 과정을 수료했다. 중학교 졸업 후 춘천으로 전기관련 직장을 다니며 어깨너머로 일을 배우는 것에 한계를 느낀 그는 제대로 된 전기기술을 배우기 위해 홀로 상경했던 것이다. 학창시절 혼자 라디오를 분해해보고, 다시 조립해보기도 하며 전자제품 원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기술학원 수료 후 청량리 등지에서 전자제품 수리기사 업을 이어갔다.
군대도 그런 그의 능력을 살려 통신부대에서 유선 통신장비를 관리하며 관련 업무를 계속할 수 있었다. 제대 후 수원 모 전자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던 그는 분업방식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차에 결혼을 하게 되며 고향인 홍천으로 돌아왔다.
“회사는 다 분업화 돼 있어 내가 하는 일이 단조롭고, 전체 공정을 모르니 발전이 없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자동차 전체를 만드는 과정은 배울 수 없고, 타이어를 담당하면 타이어만, 엔진을 담당하면 엔진과 관련된 일만 하는 일에 흥미가 떨어졌다.”
하나의 완성된 공정 전부를 알고 싶었던 그는 그러니까 전통적인 장인의 작업방식을 선호했던 셈이다. 중학생 시절부터 과학, 전기원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본인의 꿈을 전파사라는 업으로 실현하며 살고 있다.
반도체 기술 개발 후 작고, 성능 좋은 전자제품이 많이 쏟아지고 있지만 여전히도 진공관으로 만들어진 앰프의 베이스 울림을 따라갈 현대식 기계가 없다며 그 옛날 전자기술에 대해 추억한다. 가게 월세 때문에 위치를 조금씩 바꾸긴했어도 홍천읍내에서만 40년 가까이 전파사를 운영해 오고 있는 그에게 지역의 변천사를 물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파사가 20곳이 넘었다. 지금은 우리가게 포함해 3곳밖에 없다. 한 가게는 전자제품 수리를, 또 다른 가게는 전자제품 판매를, 우리는 출장수리를 위주로 하니 다행히 겹치는 부분 없이 공생하고 있다.”
이 대표가 중학생이던 시절만 해도 홍천 인구가 16만~17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산림이 대부분인 홍천에 박정희 대통령 시절 화전이 금지되자, 화전민이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수도권으로 빠지고, 이후에도 여러 이유로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지금 지역 분위기는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그는 목조건물이 대부분이었던 읍내풍경이 지금처럼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는 모습도 목도했다.
“홍천에 텔레비전 안테나는 내가 다 세웠다고 보면 돼. 하하.”
텔레비전이 보급되며 홍천 내면부터 서면까지 모르는 길이 없을 정도로 대부분 가정의 텔레비전 안테나를 달았다고 자부한다.
단골도 참 많았다. 30대에 가게를 열어 40~50대 단골이 참 많았는데 이대표가 70살이 된 만큼 많은 단골들이 세상을 떠나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성업을 이루던 시절, 이 대표의 꼼꼼한 수리 덕에 고장난 전자제품이 다시 쌩쌩 돌아가는 것에 만족한 손님들이 밥 한끼 하라며 수리비에 돈을 더 얹어주며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단골들이 지금은 80~90대시니 출장수리로 방문하며 간간히 안부를 묻는 정도다. 젊은 사람들은 AS센터를 가거나 혹은 망가지면 새로 사면 그만이다. 예전처럼 열심히 고쳐쓰고 그런 문화는 많이 없어져 단골이 예전만 못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자제품이 예전에 비해 많이 저렴해졌고, 각 전자제품 회사마다 사후관리, 보증기간이 워낙 잘 돼 있어 전파사를 찾는 발걸음은 어쩔 수 없이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홍천 어디든 기꺼이 찾아가 작은 고장부터 큰 고장까지 꼼꼼히 수리하는 전기기술 덕에 아직까지 가게를 이어오고 있는 성화전파사.
지금은 홍천에 군인 아들 면회왔다가 “어머, 여기에 전파사가 있네”하며 가끔 나이 지긋한 손님들이 추억을 회상하며 사진을 찍어 가는 곳.
성화전파사는 누군가에겐 추억, 이 대표에게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준 생업으로 여전히 홍천읍내 한 켠을 지키고 있다. 유승현 yoosh@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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