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희의동행] 아파트 둘레길 이야기

2023. 9. 5.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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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저녁식사를 마치고 산책에 나섰다.

산자락을 닦고 들어앉은 아파트여서 주변에는 산책하기에 좋은 곳들이 많았다.

아파트를 따라 호젓하게 조성된 둘레길은 물론이고 이런저런 이름을 붙인 공원들이 다붙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길은 아파트 둘레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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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저녁식사를 마치고 산책에 나섰다. 산자락을 닦고 들어앉은 아파트여서 주변에는 산책하기에 좋은 곳들이 많았다. 아파트를 따라 호젓하게 조성된 둘레길은 물론이고 이런저런 이름을 붙인 공원들이 다붙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길은 아파트 둘레길이었다. 둘레길 옆 산비탈에는 덤불과 나무가 우거진 숲이 날것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 야생의 숲은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로 흑림을 이루었는데 한낮에도 짙은 그늘 때문에 서늘한 한기와 귀기가 감돌았다. 그 한기와 귀기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우거진 덤불을 헤치고 그 숲에 들었는지 풀이 눕고 벌건 땅이 드러나 있었다. 그 길로 야생고양이가 지나가고, 이름 모를 동물들도 지나가고, 새들도 이 가지 저 가지를 옮겨 다니며 짝을 찾고 새끼를 길렀다. 하지만 나는 그 서늘한 한기가 무서워 숲 깊숙이 들어서 본 적이 없다. 굳이 숲에 들지 않아도 그 숲과 같은 그늘이 둘레길에도 내려와 있었다. 길 양쪽으로 나무들이 길을 품듯 제법 굵은 가지들을 뻗어 터널을 이룬 까닭이었다.

그 나무 터널 안에 들면 이상하게 알 수 없는 설렘이 일었다. 그곳에 들면 나 또한 하나의 나무가 되는 듯했고, 한 톨의 공기 입자가 되는 듯했고, 나 아닌 또 다른 그 무언가가 되는 듯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 안에서 한없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나를 닦달해대던 욕망과 욕심들이 부질없거나 헛것처럼 여겨져 고요히 가라앉을 수 있었고, 담담해질 수 있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게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는데, 나는 그 길을 걸으며 나를 비워내고 욕심을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마음도 버리고 생각도 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그것까지 버리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걷는 그 길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새끼를 거느린 고양이가 느릿느릿 길을 가로질러 가고, 나뭇가지에 둥지를 튼 새들은 부지런히 먹이를 실어 나르며 새끼를 키우고 있었고, 나무는 부지런히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곳에도 어김없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비정한 삷의 방식이 작동하고 있겠지만 그런 까닭에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명 활동이 놀랍고 숭고할 뿐이었다. 어떻게 살아가든, 어떻게 살아 있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애달프다. 내게는. 하지만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둘레길이 품고 있는 냄새들인데, 비릿한 수액과 흙냄새는 물론이고 시나브로 삭고 썩어 가는 것들의 냄새가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 냄새들은 다름 아니라 생멸의 과정에서 오는 에너지이자 유한한 생명의 존재에게 주어졌던 시간이 소멸되는 냄새였다. 나에게도 냄새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내 생의 냄새가.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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