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근 칼럼] 윤 대통령, 시민의 인내력을 시험하지 마라
2023년 8월의 윤석열 대통령은 당혹스러웠다. 두번째 맞은 8·15 경축사에 이어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간부위원 대화, 그리고 국립외교원 60주년 기념사로 이어지는 윤 대통령의 발언은 ‘반공 전사’ 선언과 다름없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가 대결하는 이 분단의 현실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 조작, 선전 선동으로 자유사회를 교란하려는 심리전을 일삼고 있다.”(민주평통 간부위원 대화) 불과 취임 15개월 만에 극렬 우익 이념의 전사가 돼 있다. 지난 대선 때 공개된 녹취록에서 윤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우리는 원래 좌파”라고 한 것을 떠올리면 그 급속 변신이 더욱 당혹스러워진다.
유인태 전 의원은 “뒤늦게 뉴라이트 의식의 세례를 받은 거 아닌가”라고 분석했고, 혹자는 대통령 주변의 측근들 탓을 한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이념 전사가 된 대통령은 바람직하지 않다. 4차혁명으로의 전환과 신냉전으로 가는 격변기에 웬 공산전체주의 타령인가. 전환기일수록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데 가장 경직되고 꼰대스러운 사고로 대응하고 있다.
해병대 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을 항명수괴죄로 얽어넣은 것은 현 정부의 수준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해병대 채모 상병이 실종자 수색 중 사망한 데 대한 책임을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가리는 게 공정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군 내부에서는 아예 이 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대놓고 반대하지는 못하지만, 윤 대통령과 국방부의 방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홍범도 장군 동상을 육사에서 철거하자는 것은 역사에 남을 망발이다.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당시 정세에 따라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홍 장군은 내치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본군 장교가 되어 독립군을 쫓은 백선엽은 동상을 세워 육사 생도들에게 본보기로 삼자니, 내가 하면 공정이고 남이 하면 불공정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두 사건으로 ‘공정과 상식’이라는 윤 대통령의 대선 구호는 허망해졌다. 윤 대통령의 여러 결정들이 시민이 위임한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수십년간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는 국민에게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언론인 80%가 반대하는 이동관은 청문회 결과와 무관하게 방통위원장으로 앉혔다. 대선 후보 때 본 윤 대통령이 아니다.
윤 대통령이 이념 전사를 자임한 것은 당장은 비판받아도 역사에 남는 존재가 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후대에 평가받는 지도자는 당대에도 성공한 정치인들이었다. 윤 대통령은 지지층을 결집해 내년 총선에서 이기는 데 전력을 다하기로 한 듯하다. 윤 대통령은 ‘이번 총선은 내 이름으로 치른다’고 말한다고 한다. 이는 곧 당 공천 개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은 공천 개입으로 처벌됐다. 당시 이 수사를 이끈 서울지검장이 윤 대통령 자신이다.
윤 대통령을 잘 아는 전직 검찰총장은 “윤 대통령에게 가장 큰 리스크는 고집”이라고 말했다. 검사일 때는 그 강골의 모습이 소신으로 비쳤지만, 대통령이 고집을 부리면 불통이 된다고 우려했다. 이대로라면 윤 대통령은 계속 자신의 길을 갈 것이고, 그렇다면 기댈 곳은 검찰뿐이다. 최근 라임·옵티머스 펀드 사건을 다시 캐는 것을 보면, 이복현 검사를 금융감독원장으로 보낸 이유가 분명해진다. 한동훈 법무장관이 남부지검에 금융수사 부서를 확충시킨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리고 고발사주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손준성 검사 등 친윤 검사들을 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이들은 야권을 향한 수사의 강도를 더욱 높일 것이다. 대법원장과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에도 자신의 친구와 법대 동기를 심어놓았다. 선거전을 유리하게 끌고갈 채비를 갖췄다.
최근 뉴스를 안 본다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난다. 문재인 정부에 실망한 데 이어 윤석열 정부를 보며 정치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다는 말이다. 윤 대통령은 이런 진흙탕이 여권에 유리하다고 볼지 모른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30% 언저리에서 맴도는 국정지지율을 믿는 것일까. 하지만 박근혜의 콘크리트 지지율 30%도 순식간에 5%로 떨어졌다. 20대와 중도층이 이미 여권 지지에서 이탈하고 있다. 이념에 물든 정책들이 후과를 부를 때, 윤석열 정부는 가장 무능한 정권으로 타매(唾罵)당할 것이다. 성경도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했다.
이중근 논설고문 harub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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