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낯선 사이] 한국 밖에서 터지는 손흥민의 해트트릭
지난 2일 영국 프리미어리그 소속 토트넘 홋스퍼는 랭커셔카운티 번리의 터프 무어에서 열린 번리와의 원정경기에서 5-2 대승을 거뒀다. 이날 손흥민은 후반 27분까지 뛰며 올 시즌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특히 첫 번째 골은 우리 몸에서 가장 통제하기 어렵다는 ‘둔한’ 발끝과 회전하는 공, 수비수들과의 싸움에서 얻어낸 성과였다. 손흥민은 마치 손에 리모컨을 쥔 듯 너무나 ‘쉽고’ 우아하게 리오넬 메시 등 최고 선수들만이 가능하다는 칩슛을 성공시켰다.
주지하다시피 손흥민은 2021~2022시즌 아시아 선수 최초로 득점왕에 올랐고, 올 시즌에는 토트넘에서 141년 만에 선임된 최초의 비유럽인 주장으로 플레잉 코치 역할을 겸하고 있다. A매치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의 성적과 경기 내용은 누가 감독을 맡느냐에 따라 기복이 심하다. 대한축구협회의 운영 문제는 자주 도마에 오른다. 히딩크가 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겠는가. 소프트웨어 인프라도 축구 ‘선진국’에 비하면 초라한 한국에서 어떻게 박지성·손흥민 같은 선수가 나올 수 있었을까.
축구뿐 아니라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나 문화·예술 분야에서 한국인의 활약은 정치·경제 수준에 비해 특출하다. 정경화·백남준부터 최근 피아니스트 임윤찬까지. 분야 특성과 그에 따른 스토리는 다르겠지만, 이런 세계적 수준의 성취는 어느 정도 사회적 산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
2009년 고려대 총장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김연아를 두고 “고대가 낳은 인재” 운운했다가 여론의 폭격을 맞은 바 있다. 김연아는 우리 사회 어느 집단에도 빚이 없다. 오롯이 그와 그 어머니의 성취라 할 수 있다. 임윤찬이나 조성진도 한국의 클래식 관객 규모를 생각하면 나오기 어려운 천재들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한국 사회의 성원이지만 시스템과는 그 ‘결’이 다른 존재다. 대개 본인의 노력과 부모의 헌신을 배경으로 꼽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국 사회 인프라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 밖에서 성장했기에 성공
근대성의 핵심 논리인 자유주의적 해석(개인의 노력) 혹은 그 반대인 구조주의적 분석(사회적 기반)은 모두 인간 현상을 설명하는 데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다. 개인의 상황은 개인과 구조의 상호작용 결과다. 개인이 구조에 반응하는 경우의 수는 개인의 숫자 이상만큼이나 많다. 노력이 모두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구조가 개인의 경험을 완전히 결정짓지도 못한다. 그래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페미니즘도 나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도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규명하기 어려운 기(氣)의 배분 운동이다. 아무도 그 행보를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기분(氣分)이 중요한 것이다.
자유주의(흔히 보수)나 구조주의(흔히 진보)가 탄생한 시기와 현재 인간의 삶은 시간과 로컬에 따른 차이가 크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특정한 인간 행동의 원인과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구조는 무엇인지, 어떤 이론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없다. 19세기 서구 일부에서 만들어진 이론이 21세기 전 세계 곳곳의 로컬에 적용될 리 만무하다.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가 아니라 지역적 행동이 지구적 이론을 바꾼다는 말이 적절하다. 만일 명확히 설명 가능한 거시적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라 도그마가 되기 쉽다.
손흥민·김연아의 공통점은 모두 한국 사회의 영향 밖에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김연아는 전혀 인프라가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고, 손흥민은 전직 축구선수인 아버지의 경험과 지식 덕분에 한국 시스템 밖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한국 사회로부터 ‘분리’해 새로운 축구 인생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잘못해서 아이의 천재성이 열매 맺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는 김연아의 어머니는 ‘낳은 자’로서 책임을 다했다. 개인의 사명이 김연아를 다른 레벨의 선수로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한국 사회가 배출했다고 보기 어려운 천재들이다. K팝의 성과가 한국적 시스템의 산물이라면, 피겨스케이팅이나 축구는 각기 다른 이유로 한국의 구조 밖에서(만) 가능했다고 본다.
바람직한 각자도생의 모델
사회구조가 변해야 한다는 진보 세력의 주장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구조 자체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본디 구조주의는 개인의 행위성을 포착하지 못한다(그래서 후기 구조주의가 나왔다). 어떤 이론도 모든 개인에게 도움을 주거나 완전히 통제할 순 없다. 구조의 영향을 뛰어넘는 개인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이 가능한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경우도 드물거니와 이는 낡은 언설이다. ‘개천’과 ‘용’ 자체를 탈식민화할 필요가 있다. 개천 없는 바다는 존재할 수 없다. 앞서 말한 대로 당대는 개천이든 바다든 구조가 힘을 쓰지 못하고, 각자도생만이 삶의 원리가 되었다. 이런 상황이 우리가 손흥민에 열광하고 그를 사랑하는 이유다.
원래 축구팬이어서, 한국의 위상을 높인 인물이어서, 실력과 인성 모두 갖추고 있어서…. 손흥민을 응원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가 각자도생의 ‘좋은’ 모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각자도생이 바람직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어차피 구조가 붕괴된 마당에 우리가 바라는 삶은 ‘인간적인 각자도생’이다. 각자도생의 법칙이 ‘타인 밀치기’ ‘약자 짓밟기’가 아니라 노력과 그에 맞는 보상이라면 그나마 견딜 수 있다.
나는 ‘선한 영향력’ 언설에 반대해왔다. 권력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하나는 책임감이고 다른 하나는 영향력이다. 바람직한 권력은 책임감이다. 그래서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이미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경쟁의 승리자이고, 승리자는 ‘금수저’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손흥민은 각자도생이라는 반인간적 세계에서 인간적으로 승리한 매우 드문 경우이다. 이제 세상은 바람직하지 않은 현실조차 희망이 되었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견디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존경할 수 있는 동시대인이 필요하다. 손흥민이 바로 그다. 형용할 수 없는 인종차별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 팬과 동료에 대한 존중, 팀에 대한 헌신만으로도 나는 위로받는다.
각자도생하는 개인·공동체들의 연대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큰 점수 차로 패배한 토트넘 상대팀, 번리는 구단 홈페이지에 해트트릭을 비롯한 손흥민의 활약상을 담은 동영상을 올렸고, 불과 하루 만에 최고 조회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패했어도 잘하는 팀에 졌다는 뜻일까. 아니면 경기 당일 중국과 일본에서 ‘손흥민’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을 정도인 글로벌 인기에 편승한 마케팅일까. 번리 구단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조회수의 폭발은 새로운 축구 문화를 추구하는 선한 공동체성의 발로, 그 일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 한국 정치는 절망적이다. 비교적 정당한 방법으로 각자도생에서 성공한 이들의 선한 영향력이 제3의 그룹으로 가시화될 수 있을까. 이론이 현실에 그대로 반영된 역사는 없었다. 마르크스주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사회는 북한·중국·러시아가 아니라 북유럽의 사회복지 국가들이다. 기존의 진보 개념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 전진하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모두 나가떨어졌다. 구조의 붕괴, 약자의 강자와의 동일시 욕망, 기후위기 등 현상은 진보 이론의 전제가 이미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존의 보편성 개념을 재구성해 마르크스주의 ‘수정주의자’들로 오해받는 버틀러·지제크·라클라우의 좌담집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좌파에 대한 현재적 대화들>(2009)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런 책은 중요하지만 잘 팔리지 않는다. 그래도 이런 책을 번역(박대진·박미선)하고 출판(도서출판 b)하는 이들이 있다. 쉽지 않은 실천이다.
지옥에서는 모든 ‘작은’ 실천, 움직임, 선한 의지가 소중하다. 이 글을 마무리할 즈음 ‘김건희법’ 소식이 보도됐다. 손흥민을 생각하면서 나는 ‘정신 승리’ 중이다.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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