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질 때 [어도락가(語道樂家)의 말구경]
편집자주
세상 언어들의 이모저모를 맛보는 어도락가(語道樂家)가 말의 골목골목을 다니며 틈새를 이곳저곳 들춘다. 재미있을 법한 말맛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며 숨겨진 의미도 음미한다.
본국보다 외국에서 인기를 끄는 작가나 가수, 연예인이 있다. 예컨대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한국에서 인기가 더 높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독일 작가 안톤 슈낙(Anton Schnack·1892~1973)도 독일보다 한국에서 훨씬 유명하다. 게다가 그래도 여러 언어로 번역된 베르베르의 작품과 달리, 안톤 슈낙의 번역서는 오직 한국어밖에 없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Was traurig macht)이라는 짧은 수필이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30년 남짓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당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도 많이 추억한다. 그 이후에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그 수필의 추억이 없으나, 남들의 추억을 잠시 향유하는 재미도 있다.
수필가로도 활약하다 6·25 때 납북된 1세대 독문학자 김진섭(1903~?)의 번역으로 알려진 수필이다.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에서 ‘초가을 햇살’ 대신 쓴 ‘초추의 양광’을 보면 시대도 그렇겠지만 김진섭은 의고체(擬古體)에 어울릴 한자어를 선호한 듯하다. 1936년 4월 3일자 조선일보 코너 기문선역(奇文選譯)에 처음 나오는데 그때는 ‘작은 새’도 小鳥(소조)라 했듯 한자어가 더 많았다. 나중에 교과서에 실리며 일부 표현은 수정됐지만, ‘초추의 양광’은 그 독특한 느낌 때문인지 그대로 남았다. 슈낙은 일본에서 알려진 작가도 아니라서, 일본어 중역 탓에 나온 한자어도 아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수필이나 글쓰기에 관한 글이나 책에서도 여전히 꽤 많이 언급된다. ‘초추의 양광’이라는 다소 특이한 문구도 자주 오르내리는데 독일어 원문엔 ‘햇빛’이 없다. 즉 글자 그대로는 ‘초가을이 드리워졌다(ein früher Herbst gefallen ist)’인데 역자가 양광(햇살/햇빛)까지 넣어서 풀었다. 작고 알록달록한 새의 송장(eine kleine, schillernde Vogelleiche)은 알록달록하다는 묘사를 뺐다. 번역에서는 글의 분위기나 역자의 선택에 따라 낱말이 새로 들어가거나 원래 있던 게 빠질 수 있다. 알록달록(schillern)은 빼는 대신 햇빛(Schein)은 넣으면서 벌충한 듯싶다.
흥미롭게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수필집(차경아 번역)’ 2011년 판까지도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로 최초 김진섭 번역의 기조와 다르지 않고, 2017년 판 “초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 한 모퉁이에서 오색영롱한 깃털의 작은 새의 시체가 눈에 띄었을 때”도 ‘오색영롱한 깃털’은 원문을 살려서 보태면서도 ‘햇살’은 그대로 놔뒀다. 정작 독일에서는 표현주의 문학 연구자나 좀 알아볼 안톤 슈낙의 글은 오히려 한국에서 번역으로 원작이 된 셈이고, ‘초추의 양광’이 지닌 슬픔의 아우라를 싹 죽이기보다는 ‘초가을 햇살’로 잘 알아보게 풀어내 더 좋아졌을 것이다.
이제 가을로 접어들었으나 전국 주요 지역에서 한낮은 여전히 온도가 30도에 육박하고 햇볕도 한여름처럼 뜨겁다. 초가을이 드리워진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투덜댄다면 성질이 급한 걸까. 꼭 기후 위기 탓인지는 몰라도 아직은 따사로움을 넘어 따갑기까지 한 초가을 햇살이 새로운 시절의 맥락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슬플 수도 있을 테니, 혹시 안톤 슈낙 수필집 번역 개정판이 언제고 또 나온다면 햇살은 그대로 내리쬐도록 놔둬도 슬프기에 좋을 것이다.
신견식 번역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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