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애 칼럼] 과학기술계 리더들이 나설 때다
"연구현장 분위기가 많이 안 좋습니다. 실험실을 복구하려면 몇 년이 걸릴 텐데…. 그나마 연구자들의 의지가 꺾이면 힘들죠." "이공계 인재들은 R&D를 통해 길러지는데 석·박사 양성 생태계가 흔들릴까 걱정입니다."
IMF 외환위기에도 줄지 않았던 R&D 예산이 이번에 대폭 삭감됐다. 예산 삭감 찬서리가 내린 연구현장의 분위기가 싸늘하다. 아니,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 과학기술을 정책 최우선 순위에 두겠다고 했던 정부가 변심했다는 원망의 목소리가 크다. R&D 현장의 디테일을 모르는 정치권과 행정관료들이 제대로 된 진단이나 해법 없이 무딘 칼을 휘둘렀다는 지적이다.
방패막이 역할을 못하거나 안한 과학기술 행정관료들에 대한 불만도 크다. 반면 과학기술 행정관료들은 연구계의 태도가 아쉽다고 얘기한다. 지금까지 R&D 정책부터 사업관리까지 연구자들이 중심에 있었는데, 그로 인한 문제를 짚어볼 때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당한 공공적인 책임과 요구를 연구자들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덮고 넘어가서는 문제를 키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R&D에 일정 부분 비효율과 방만이 있었던 것은 맞다. 그런데 짚어봐야 할 점은 그 비효율과 방만이 연구현장을 잘 모르는 심판들이 수시로 무딘 칼을 휘두른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걱정스러운 점은 이번에도 그런 무딘 칼로 엄한 부분만 수술하고 끝내는 것이다. 섬세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문제를 도려내는 디테일이 수반되지 않으면 이번도 또 한번의 야단법석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병을 고치는 게 아니라 키울 수 있다.
병을 진단하고 고치는 것은 그 병을 잘 아는 전문의가 하듯이, 연구현장의 문제를 속속들이 찾아내고 고치는 것도 현장을 잘 아는 연구자들이 나서야 한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문제를 찾고 후속세대를 위해 더 나은 환경을 물려주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단순히 예산을 얼마 늘리고 줄이느냐의 문제로만 볼 게 아니다. 투자가 정말 필요한 분야에 이뤄지는지, 그 과정에서 숨은 비효율은 없는지, 과학기술이라는 이유로 받는 것을 너무 당연히 여기진 않았는지 자성부터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선 톱다운 식의 내려치기가 아니라 바닥부터 샅샅이 들춰가며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과학기술계가 스스로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찾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과기계에서도 스스로의 문제를 짚어봐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다. 그들이 자존심을 지켜가며 국가와 후속세대를 위해 머리를 맞댈 수 있게 해야 한다. 지금까지 호흡을 맞춰 우리나라를 과학기술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과학기술 관료와 연구자들이 서로에게 문제를 떠넘길 게 아니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연구현장에 켜켜이 쌓인 비효율과 방만의 가장 큰 원인은 '신뢰 부족'이다. 믿지 못하니 온갖 족쇄와 틀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맞추다 보면 실질이 흐트러진다. 도전과 혁신보다는 가두리 환경에 최적화된 연구자가 양산된다.
이번 계기에 다 걷어내야 한다. 연구자들은 더 절실한 마음으로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야성과 절실함을 잃는 순간 연구실은 포근한 개인 사무실이 된다.
과학기술은 자유로운 비판과 논쟁을 통해 진화해 왔다. 더 나은 연구 생태계를 위해 행정가부터 연구기관장, 과학기술 커뮤니티 리더, 연구자들이 치열한 대화를 해야 한다. 각자가 짚어낸 R&D 현장의 문제를 낱낱이 꺼내놓고 해법을 얘기해야 한다.
이 논의는 과학기술계 리더들이 이끌어야 한다. 어느 쪽에서도 편치 않은 시선을 받을 수 있지만 말이다. 대통령 직속 과기자문회의와 과학기술자들의 단체인 한국과총, 25개 출연연 원장, 카이스트를 비롯한 과기특성화대학 총장들이 전면에 나설 필요가 있다.
상세한 내년 예산 명세서가 날아오고 평가가 안 좋은 과제에 대한 연구비 삭감조치가 본격화되면 연구현장은 강한 내홍에 휩싸일 수 있다. 이를 딛고 일어서지 못하면 돌이키지 못하는 상처가 남고 연구 경쟁력은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 연구현장의 열기가 다 식어버린 후 다시 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금 당장 아프고 불편한 얘기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ICT과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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