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미술·음악·건축 아우른 현대 설치작 향연
춘앵무 화문석서 영감받고
세종 악보 '정간보' 참조한
주요작품 등 130점 펼쳐
'돗자리 작가' 강서경(46)의 작업실 바닥에 깔렸던 은빛 철판.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상태 그대로 구멍을 뚫고 그 사이로 검정 실을 꿰어 표면을 덮었다. 각 철판이 동그랗게 말리고 탑처럼 올라간 모습은 거대한 인물상 같다. 하지만 제목은 여전히 '바닥#23-01'(2020~2023)이다. 설치작품 아래에 나무 바퀴를 달고 곧 움직일 것 같지만, 언제든 바닥으로 다시 내려올 가능성도 품었다. 마치 접혔다 펼쳐지는 돗자리처럼.
한국화 전통에서 출발해 조각, 설치, 영상 등으로 확장 실험을 해온 강서경의 개인전 '버들 북 꾀꼬리'가 오는 7일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개막한다. 지난 4일 미리 둘러보니 초기 대표작부터 신작까지 총 130여 점이 미술관 M2 전시장과 로비에 펼쳐졌다. 다소 산만해 보이지만 삼라만상이 어우러진 세상을 은유한다.
쇠약한 할머니가 몸을 일으키는 장면을 건조대 등을 활용해 만든 '그랜드마더 타워'는 물론 아담한 키의 작가를 닮은 '좁은 초원' 등 만나볼 것들이 가득하다. '인왕제색도'에서 튀어나온 듯한 산세를 그대로 살린 '산' 연작은 계절 특성을 고스란히 품었다.
작가는 세종대왕이 창안한 유량악보 '정간보'의 기호를 참조한 모양의 '정井' 연작과 언어학의 짧은 단위를 지칭한 '모라'로 시간과 서사를 쌓아 올린 회화 연작, 조선시대 1인 궁중무 '춘앵무'(버드나무 가지에서 맑게 지저귀는 꾀꼬리 모습을 닮은 춤)의 춤추는 공간 경계인 화문석에서 착안한 '자리' 연작으로 독자적 세계관을 구축했다. 하지만 다양한 두께 캔버스의 평면회화 '모라' 27점을 쌓고 물감을 흘러내리게 해 만든 거대한 탑 '모라와 검은자리'(2014-2018)처럼 2차원과 3차원 경계를 넘나든다. 동양철학의 정신이 서양 모더니즘 같은 그리드(격자) 형식처럼 구현되며 동서양은 물론 과거 전통과 현재가 해체되고 왕래하는 경지를 열어줬다.
곽준영 리움미술관 실장은 "한국화에서 출발한 작가가 전통 미술과 음악, 건축 등의 요체를 현대사회 맥락 속에서 본인의 정교한 시스템으로 승화시킨 능력이 탁월하다"고 설명했다.
처음 선보인 모빌 형태의 '귀' 연작은 천장에 달려 보이지 않는 기류에 미세하게 움직인다. 청각과 촉각, 움직임 등 공감각적 특징을 드러내는 이 작품은 귀뿐 아니라 얼굴, 발 등 다양한 신체 요소를 극히 단순화한 형태의 차갑고 딱딱한 금속조각으로도, 그 위에 가죽이나 실 등 부드러운 소재와 어우러져 새로운 의미를 더한다. 공간 속에서 퍼져나가는 소리의 파장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로비의 대형 모니터에 펼쳐진, 전시 제목과 같은 15분짜리 영상은 전시를 여닫는 문의 역할을 한다. 중력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듯한 검은 공간 안에서 화문석들이 펼쳐지고 모빌이 돌아가기도 하고 작품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과 손발이 보인다. 공간에 펼쳐진 작품이 이젠 2차원 평면에 들어간 듯하다.
이날 작가는 지난 2년간 투병에 이어 항암치료 중임을 밝히고 "미술은 함께한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하는 그들이 같게 만들어내는 풍경이 무엇일까 더더욱 생각했다"며 "이번 전시는 수만 명의 꾀꼬리들이 풀려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작가는 로비와 1층 전시장에 마련된 평상 같은 원형 의자 작품에 애정을 드러냈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대형 설치 작품 '밤'(2021)과 염색된 울로 낮 풍경을 그리드처럼 표현한 평상 같은 작품 '낮'이 조응한다. 작가는 "산 정상에 올라서 쉬듯 이곳에 앉아 주변 풍경(전시)을 감상하면 좋겠다"고 했다.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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