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입국” 믿던 과학계, R&D예산 삭감 배신감에 이례적 ‘집단반발’
“연구 현장 파괴”…국회 예산 심의 주목
내년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이 약 14%나 삭감된 가운데 과학기술 관련 단체들이 예산 즉각 회복을 촉구하고 나섰다. 단체들은 “정부가 과학기술계를 ‘카르텔’로 매도했다”며 사과도 요구했다. 카이스트 등 9개 대학·대학원 학생회도 정부 비판에 가세했다.
과학기술계에서 정부 정책에 대한 조직적인 집단반발은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다. 당초 ‘과학기술 입국’을 강조해온 윤석열 정부에 대한 기대심이 배신감으로 폭발한 모습이다.
과학기술계 관련 단체들은 5일 대전 연구개발특구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를 출범시킨다고 발표했다. 연대회의에는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전국과학기술연구전문노동조합 등 9개 과학기술 관련 단체가 참여한다.
연대회의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연대회의가 출범하는 건 윤석열 정부의 과학기술계에 대한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탄압에 맞서 국가 과학기술을 바로 세워 국가의 미래를 지켜내고자 하는 간절함 때문”이라고 밝혔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내년 주요 R&D 예산을 올해보다 13.9%(3조4000억원) 줄였다. 주요 R&D 예산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직접 지원되는 예산이다. 여기에 이공계 대학 지원금 등 기획재정부가 과학기술 발전을 간접 지원하는 일반 R&D 예산을 합치자 감소율은 16.6%(5조2000억원)로 더 커졌다. 정부 전체 R&D 예산이 줄어든 건 1991년 이후 처음이다.
연대회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주요 사업비(R&D 활동에 순수하게 들어가는 비용)가 30% 가까이 강제 삭감됐다”며 “현장과 소통 없이 ‘정부 R&D 제도혁신 방안’이라는 명목으로 연구 사업에 상대평가를 도입해 하위 20% 사업을 강제 구조조정을 하겠다고도 예고했다”고 밝혔다. 연대회의는 “이는 명백히 과학기술을 무시하고 연구 현장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특히 R&D 예산 삭감의 진원지가 된 ‘카르텔’이란 용어에 강하게 반발했다. 연대회의는 “현 정부는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묵묵히 이바지해온 연구 현장을 비도덕적 카르텔로 매도하며 예산 삭감을 강행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와 관련해 연대회의는 정부에 사과를 요구했다.
연대회의는 “위법하고 졸속적으로 삭감한 R&D 예산을 즉각 원상회복할 것을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관료가 급조한 명령하달식 제도 혁신 방안을 철회하고 연구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정책을 수립하라”고 밝혔다.
과학기술계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뜻을 집단 표출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당초 과학기술계에선 내년 R&D 예산이 소폭 증액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오히려 대폭 감액으로 정리되자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R&D 예산 감축은 한국의 미래를 이끌 이공계 젊은 인재들 사이에서도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카이스트와 포스텍 학부 총학생회 등 9개 대학·대학원 학생회는 지난달 28일 발표한 성명에서 “과학자들이 창의적인 연구를 통해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이바지하고, 미래 과학자를 목표로 한 학생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학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R&D 예산 삭감 재고와 과학자들에 대한 존중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국회에선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삭감된 R&D 예산안을 집중적으로 점검하겠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날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결산심사에서 이정문 민주당 의원은 “절차에 따라 과학기술계와 협의할 충분할 시간이 있었는데도 R&D 예산 전체를 예고 없이 난도질했다”고 지적했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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