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박찬욱 선언문’[2023 박인환상 영화평론 수상작]
“나를 만지지 마라. 왜냐하면 내가 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만짐은 너를 떼어놓음으로써 지켜주는 것과 같다.”
- 장 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中
박찬욱 작품을 보고 “이 영화가 대체 뭐지?”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제 없는 것 같다. 박찬욱이 더 이상 금기에 도전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국 사회가 더 이상 박찬욱이 던지는 이야기에 움찔할 정도로 폐쇄적인 사회가 아니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건 해외영화제의 인준을 거쳐 ‘거장’의 지위에 오른 박찬욱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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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정말 박찬욱 영화를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봐도 좋은 것일까? 나는 박찬욱 영화를 볼 때면 언제나 불편했고, 여전히 불편하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박찬욱의 작품을 불편해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서사적인 측면에서 금기를 건드리고, 장르적인 측면에서 빗겨나고 실패한다는 박찬욱 영화의 알아보기 쉬운 특성에서 눈을 돌려야 한다. 박찬욱의 영화는 그 안에서 근친상간이 벌어지고 신체 훼손이 남발되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우리는 박찬욱이 지금껏 건드리고 있던 진정한 핵심, 즉 박찬욱이 쉼 없이 도전한 영화적 금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여기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세계인은 아직 박찬욱의 영화를 똑바로 본 적이 없기에, 박찬욱 영화를 다시 제대로 보는 것에서 이 논의는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니 묻겠다. 당신은 박찬욱의 영화를 진정으로 보았는가? 당신은 박찬욱을 진정으로 아는가? 나는 당신이 감독 박찬욱에 까막눈이라는 사실을 닭이 두 번 울기도 전에-실은, 이 글이 끝나기 전에-최소한 세 번은 설득해 보이겠다. 이어지는 세 개의 선언은 박찬욱을 안다고 착각하는 당신을 향한 도전장이다.
첫 번째 선언: 찍는 것 - 죽음을 사랑하기
박찬욱 영화에서 처음 개미가 등장한 것은 <공동경비구역 JSA>였다. 영화 후반부,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오경필(송강호)은 자신의 손가락 위를 기는 개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당시 평자들은 이 장면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공동경비구역 JSA>의 개미가 가진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논한 글은 현장 비평계와 학계를 모조리 뒤져봐도 딱히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사실상 재데뷔를 거치는 것과 같았던 중고 신인 박찬욱의 신작 <공동경비구역 JSA>에 나오는 개미 한 마리는 서사적으로나 이미지적으로나 이전 작과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이 대뜸 튀어나온 의문 부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로도 박찬욱은 개미를 중심으로 한 곤충 이미지에 천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당장 후속작인 <복수는 나의 것>이 그렇다. 여기서는 개미 이미지가 직접 등장하는 대신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영미(배두나)는 류(신하균)와 섹스를 하며 개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영미는 류에게 묻는다. “너는 (소꿉친구인) 우리 둘이 이런 사이가 될 줄 알았어?” 류는 이 질문에 긍정하고, 그러자 영미는 “너는 개미 같은 녀석”이라면서, 개미는 예지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류가 개미와 비슷한 존재라면, 과연 어떠한 점이 그러한가?
<올드보이>의 지하철 장면이 이에 대한 단서를 던진다. 이 장면은 먼저 오대수(최민식)가 개미 환각을 봤다는 것을 알게 된 미도(강혜정)가 “가장 외로운 사람만 개미를 본다”고 말하며 시작된다. 미도에 따르면 개미는 항상 떼로 다니기 때문에 외로운 사람이 개미 환각을 본다. 자기는 개미를 본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미도의 상상(혹은 회상) 속에서 전철 하나가 길게 펼쳐진다. 그런 미도를 개미의 뒤에서 카메라가 오버 더 ‘더듬이’ 샷으로 찍는다. 이에 대한 리버스샷은 미도의 뒤에서 개미를 바라보는 오버 더 숄더 샷인데, 여기서 뜻밖에도 개미가 사람처럼 거대한 크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뎀!>의 방사능 개미처럼 거대한 괴물도 아니고 오경필 중사의 손가락 위를 기어가던 평범한 곤충도 아닌, 사람이 개미 모양 인형탈을 쓰고 있는 듯한 크기의 개미-인간. 카메라는 그런 개미-인간과 미도 사이를 샷-리버스 샷으로 오가며 개미에게도 사람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시선이 있는 것처럼 이 장면을 찍는다.
곤충도 응시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이 암시는 영화사적으로는 먼저 ‘벽 위의 파리’라는 비유를 떠오르게 한다. 이것은 ‘다이렉트 시네마’라 불리는 북미의 다큐멘터리 방법론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이렉트 시네마’란 찍고 있는 대상과 상황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는 관찰자적 촬영 양식인데, 여기서 ‘벽 위의 파리’란 ‘다이렉트 시네마’ 속 카메라를 뜻한다. 곤충의 시선으로 대상을 찍는다는 점에서 언뜻 보기에 <올드보이>의 오버 더 더듬이 샷은 ‘벽 위의 파리’를 떠오르게 하지만, 지하철에 앉아 있는 개미-인간이 벽 위의 파리처럼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피사체가 시선을 줄 수밖에 없는 강렬한 존재감을 지닌 생물이라는 점이 다르다. 다시 말해서 이 개미-인간의 시점 샷은 그 자신이 아무리 조용히 있으려고 해도 그 존재 자체가 상황에 대한 개입일 수밖에 없는 그런 이상한 샷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이 개미-인간을 피사체로 생각해보면, 이 피사체는 단순한 응시의 대상이 아니라 응시의 주체이기도 한, 몹시 이상한 피사체이다. 카메라이면서 피사체이고, 또 누군가를 바라보는 응시의 주체이기도 한 개미-인간. 류는 복수의 주체이자 대상인 존재로서, 이 개미-인간과 비슷한 유동적 지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개미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으로 돌아가 다시 곰곰이 떠올려보면, 이 영화에서 곤충이 나타나는 인상적 장면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진(송강호)이 류의 ‘누나’(임지은)를 발견할 때, 돌을 들어 올리자 지네가 그 시체 위를 기어간다. 시체의 얼굴 위를 기어가는 곤충 이미지는 <복수는 나의 것>을 포함해 최소한 세 번 이상 박찬욱 영화에 등장한다. <복수는 나의 것>의 지네를 포함해 <스토커>에서 찰리(매튜 구드)의 얼굴 위를 기어가던 거미와 <헤어질 결심> 속 기도수(유승목)의 눈알 위를 기던 개미가 그것이다. 만약 영화를 넘어서 사진까지 논의를 확장 시켜 본다면, 신에게 바친 공물인 썩은 과일 아래 들끓는 개미 떼를 찍은 정물 사진인 <페이스(Face) 205>(2017)도 이 계보에 끼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물화 속 썩은 과일은 부패, 노화, 죽음과 연결되는 이미지이기에 이 작품 속 과일 이미지가 유사-시체 이미지라는 해석이 그리 무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찬욱은 자신의 영화에서 곤충을 시체나 죽음과 깊게 결부시키고 있는데, 동시에 <올드보이>에서 시선을 지닌 개미를 등장시키고, <헤어질 결심>에서는 눈알 위에 달라붙던 개미로 인해 급기야 시체의 시점샷이 등장해 개미가 눈 위를 기어가는 듯한 장면을 연출한다는 점을 미루어보아, 곤충은 응시와도 관련이 있다.
죽음과 응시가 깊게 결부되는 이 상황은 박찬욱 영화에서 절대 낯설지 않다.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유명한 대사 탓에 “말이 너무 많아서” 파멸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오대수는 자신의 입이 아닌 눈 탓에 파멸한 것이다. 그가 이우진이 자신에게 복수하게 된 이유를 깨닫게 되는 회상 장면을 하나씩 따져보자. 먼저 오대수는 미용실을 운영하는 동창생의 허벅지를 뚫어지게 쳐다본다(현재). 직후 자전거를 타고 있는 이수아의 허벅지로 장면이 전환된다(과거).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오대수는 명백히 이수아의 허벅지를 보고 있었고, 까맣게 잊었던 기억을 되살리는 촉매가 될 정도로 그 허벅지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다. 그가 이수아 주변에서 까불거리며 놀다가 이수아가 말을 걸자 부리나케 달려와 대화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당시의 오대수가 이수아에게 성적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는 점은 꽤 명확해 보인다. 그는 스스로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건 이 호기심 탓에 이수아를 끝까지 쫓아갔고, 결국 이수아와 이우진이 섹스하는 장면을 깨진 유리창 너머로 목격하고 만다. 아르테미스의 알몸을 본 대가로 죽음을 맞이한 악타이온처럼, 혹은 고다이바 부인의 알몸을 보고 눈이 먼 톰처럼, 오대수의 근본적인 죄는 자신이 본 것을 떠벌린 것이 아니라 이수아를 응시했다는 행위 그 자체다. <박쥐>에서 태주(김옥빈)를 힐끗 훔쳐보던 승대(송영창)가 끝내 태주에게 죽었듯이, 관음증은 박찬욱 세계에서 중죄로 취급된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이다. 왜 박찬욱 영화 속 곤충은 죽음과 응시를 동시에 가리키는 것일까?
<스토커>에서 박찬욱은 노골적인 거미 이미지를 도입해 이에 대해 논하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 인디아는 스토커 가문의 일원으로서 피에 새겨진 살인 본능과 초감각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역시나 스토커 가문의 일원으로서 인디아의 그런 기질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인디아를 데리고 사냥을 다니며 인디아가 가진 충동이 인간을 향하지 않도록 조절한다. 인디아가 딱 한 번 떠올리는 아버지와의 사냥 장면은 영화 촬영에 대한 메타포를 지니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뤼미에르 작 <아기의 식사 Repas de bébé> 속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잎사귀에 매료’된 수많은 관객에 대한 전설적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하는)와 구름을 한참 지켜보다가 사냥총 스코프 너머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쏘아 죽인 새를 박제하는 것 등이 영화 촬영에 대한 히치콕적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로 촬영과 사격이 모두 동사 shoot로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키틀러에 따르면, “영화 카메라의 역사는 자동 무기의 역사와 일치”하며, “이미지의 운반은 단지 총알의 운반을 반복할 뿐”(프리드리히 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몸속에 거미를 받아들인 인디아는 총을 쏴 삼촌인 찰리를 살해한다. 그 순간 찰리의 얼굴 위를 기어가는 거미는 인디아가 쏜 것이 실은 총이 아닌 카메라이며, 그 안엔 총알이 아닌 거미 이미지가 장전되어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은밀히 암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올드보이>에서 이수아가 죽기 직전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의미로 카메라의 촬영 버튼을 누르고, 이것이 이우진이 총을 쏘는 장면으로 곧장 이어지는 편집은 카메라와 총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한다. 또한 이것은 찍는다(shoot)는 행위가 죽은 대상을 기억하는 ‘시체도착증’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암시로 보이기도 한다.
폴 윌먼은 시네필 문화에 대해 논하며, 이것이 “죽은 것, 과거의 것, 그러나 기억 속에 살아있는 무언가와 관련된” 것으로서, 일종의 “시체도착증”을 “배음”처럼 깔아두고 있는 행위라고 논한다(Willemen, Paul. Looks and Frictions. p. 227.). 박찬욱 영화는 폴 윌먼의 ‘시네클로필리아’론에 대한 가장 적합한 근거로 보인다. 본인부터가 시네필 출신이었던 박찬욱 영화에서 카메라의 응시는 절시증적인 속성을 하고 있으며, 또한 죽은 대상을 보존하려는 시체도착증적 속성을 하고 있다.
일찍이 KOFA에서 한 관객이 박찬욱 영화 속 개미가 가진 의미에 대해 묻자 “그런 건 없다”며 웃어넘겼던 영화감독 박찬욱(박찬욱)은, 사진가 박찬욱(박찬욱)으로서 <페이스(Face) 205>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적극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공물을 먹는] 그들은 개미의 형태로 현현한 신일지도 몰라요.” 이는 박찬욱이 자기 작품 속 개미에 대해 남긴 유일한 코멘트이다.
티벳인들은 풍장을 지낼 때 수호신 다키니가 독수리로 현현해 내려와 시체를 뜯는다고 믿는다. 하늘과 땅을 오가는 독수리를 따라 죽은 이가 윤회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박찬욱은 시체 청소부로서의 카메라야말로 ‘응시의 대상’을 기억 속에서 윤회시키는 존재라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응시의 대상을 윤회시키는 카메라라는 존재.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모든 일을 끝내고 죽음을 맞이한 시체에게도 윤회란 축복인가? 앞서 인용한 박찬욱의 코멘트에서 이어지는 바로 다음 문장. “[아니면 신이 아닌] 엉뚱한 것들이 먹는다고 볼 수도 있죠.” 개미가 신이 아닌 엉뚱한 것이라면, 그 정체가 무엇일까?
두 번째 선언: 찍히는 것 - 악마를 소환하기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금자(이영애)는 천사이자 마녀로 불린다. 이런 이중성은 영화에서 금자에게만 적용되는 요소는 아니다. 영화 후반부, 빵집에서 뒤풀이하는 장면을 보면, 유족들이 송금 계좌에 대해 논하던 도중 프랑스에서는 말이 끊어지는 어색한 정적을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라고 표현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그때 모든 이를 훑으며 지나간 것은 천사가 아닌 카메라다. 이들은 카메라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다. 유족들은 이 카메라를 천사로 여기고 하늘을 본다. 카메라는 그 시선에 호응하듯이 천장으로 올라가 샹들리에를 찍는다. 그러나 그들이 방금 저지른 짓을 떠올려보면, 과연 이 정적을 유발한 카메라가 천사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 아무리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끔찍한 살해를 저지른 후 벌인 뒤풀이 파티에서 돈에 대해 논하던 중 나타난 존재가 천사가 맞을까?
이 장면을 유심히 보면, 금자만 홀로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천국이 아닌 지옥을 보고 있다. 백한상(최민식) 살해 공범들 사이에 나타난 카메라가 실은 천사가 아닌 악마에 가까운 존재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메라라는 악마와 계약한 마녀 이금자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것이다. 악마와의 계약은 원하는 것을 주지만, 원하는 형태로 주진 않는다. <친절한 금자씨> 안에서 카메라와 금자가 맺은 계약 관계는 시간에 따라 변한다. 그 과정은 박찬욱 영화 전체에서 피사체가 카메라와 맺고 있는 관계를 요약하는 것처럼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금자가 ‘동부이촌동 박원모 어린이 유괴사건’의 범인으로서 현장검증을 하는 모습은 두 번 반복된다. 처음은 목사의 시선을 거친 TV 속 뉴스 보도 화면이고, 그다음은 금자와 형사의 회상으로 시작해 천연덕스럽게 이어지는 플래시백이다. 같은 사건을 찍은 것이지만 둘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뉴스 보도 장면에선 이금자가 위축된 상태로 마스크 뒤에 숨어있다. 여기서 카메라와 금자의 관계가 설정된다. 회상 장면에선 이금자가 도리어 마스크를 벗고 카메라를 쳐다본다. 여기서 카메라와 금자의 관계 변화가 이루어진다. 핸드헬드 기법으로 찍혀 흔들리는 상태에서 왼쪽을 비스듬히 쳐다보는 이금자의 시선은 형사를 바라보는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회상이 끝나고 곧장 조응하며 등장하는 샷이 오른쪽으로 시선을 두며 근식을 쳐다보는 금자의 샷이기 때문에 금자의 시선이 영화 내 인물을 향했다는 점은 비교적 명확히 드러난다. 두 장면 모두 등장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는 영화적 금기를 어기고 있진 않다. 하지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이 움직였다고 할 때 관객은 자연스레 그 과정에서 금자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을 것이란 연상을 할 수밖에 없다. 샷과 샷 사이에 있는 공백에서 우리는 금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이 장면에서 사용된 내레이션의 존재는 이런 주장에 힘을 보탠다. 금자를 3인칭으로 호명하는 전지적 내레이션은 서로를 응시하는 카메라와 금자의 모습을 저 멀리서 관찰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회상 속 현장검증을 첫 번째 뉴스 보도 장면과 같은 시간대에 일어난 동일한 사건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 장면은 회상으로 인해 일어난 플래시백이고, 금자의 시점에서 재구성된 기억이다. 회상을 시작할 당시 금자는 이미 감옥을 나와 복수를 진행하고 있다. 말하자면 금자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 겁먹은 과거의 자신과는 달리, 당당하게 카메라와 맞서는 자신을 상상한 것이다. 이때부터 공백에서 금자와 눈이 마주친 카메라는 마치 겁을 집어먹어 금자를 피해 다니는 것처럼 행동한다. 금자가 근식과 성관계를 맺은 뒤 백한상에 대해 고백하며 옷을 갈아입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금자가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정면으로 찍지 않는다. 금자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침대에 누운 근식을 찍다가, 금자가 옷을 다 입고 나서야 선반 너머로 은밀하게 금자를 훔쳐본다. 금자에게 들키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구는 것이다. 금자가 카메라와 다시 마주치는 것은 복수가 거의 달성된 시점이다. 약을 먹고 기절한 백한상의 머리카락을 가위로 자르던 이금자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 본다. 이것은 금자 입장에서는 드디어 상상이 아닌 현실에서 카메라를 향한 승리를 선언하는 샷인 것이다. 하지만 금자는 이때 카메라 역시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상황이 반전되는 것은 이 다음이다. 감옥에서부터 이어진 금자의 복수가 위 샷에서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후, 폐교에서 2부가 시작된다. 2부의 시작이 금자가 자신의 딸에게 사과하는 장면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 장면이 기묘한 이유는 금자와 딸 사이를 잇는 번역자가 둘의 원수인 백한상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협박했듯이, 금자는 백한상을 협박해 그를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이자 중간 매개자로 써먹는다. 그런데 백한상은 자아가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하고 볼 일이 끝나면”이라는 말을 하자, 백한상은 그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말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헛웃음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터뜨린다. 그런데 계속해서 말이 이어지고 금자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금자 주변을 암전시켜 금자가 어둠 속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그린다. 하나의 가상공간이 설정되고, 백한상 역시 감정이 없는 기계 번역기처럼 단순한 번역자로 기능하는 듯 보인다. 혹은 영화가 그런 아이러니한 착각을 유도한다. 하지만 ‘little boy’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결국 투명한 매개자가 아닌 백한상에 불과하다. 금자가 “어떤 아이”라고만 표현한 누군가를 명확하게 ‘남자아이’로 번역한 것은, 어떤 아이의 정체를 알고 있는 백한상에게만 가능한 번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중대한 힌트를 받고도, 카메라 또한 투명한 유리창처럼 세상을 비추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만의 시선을 지닌 생물과 같다는 것을 금자는 눈치채지 못한다.
결국 2부 시작 장면을 기점으로 상황은 반전된다. 금자는 카메라를 보며 울음을 터뜨리고, 백한상을 죽이기 전 망설인다. 금자가 백한상의 턱에 총을 겨눠 백한상이 웃는 것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소리를 내지르자, 운명을 알리는 알람(“선생님, 일어나세요. 출근해야죠.”)이 울린다. 휴대폰에 매달린 키링을 보고 무언가를 깨달은 금자를, 백한상은 자못 의기양양 바라본다. 이때 금자가 긴장했다는 사실은 배우의 연기와 이를 강조하는 촬영을 통해 명백히 드러난다. 금자는 다시 카메라에 쫓기기 시작한다. 백한상이 대화의 주도권을 쥐려고 시도하는 것은 자신이 카메라와 마찬가지로, 금자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금자의 복수극이라는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제물로서.
금자는 백한상이 죽인 아이들의 유족을 불러모아 상영회를 연다. 아이들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단체 관람하는 장면은 흡사 동아리에서 진행하는 작은 영화 상영회처럼 보인다. 이것은 아주 잔인한 버전의 영화 공동체다. 그리고 상영할수록 상황은 악화한다. 비로소 금자는 머리를 감싸며 자신이 불러낸 존재인 카메라가 실은 큰 대가를 요구하는 악마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카메라는 ‘쑈’를 원한다. 그러나 이제 발을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금자는 GV를 시작한다. 이금자는 이제 카메라가 두려워하는 규칙의 파괴자가 아닌 단순한 출연자이자 해설가로 전락한다. 즉, 영화에 깊게 연루되고 만다. 내부자가 된 신세를 인정하고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하지만, 이제 카메라는 전혀 피하는 기색 없이 금자를 찍는다.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금자만이 아닌 카메라이기도 한 것이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경계선에서 피어오르는 감정표현은 박찬욱 영화의 작가적 인장 중 하나로, 이 영화에서 세 번째로 반복된다. 금자가 백한상을 묻은 직후다. 영화는 금자의 모호한 표정을 TV 화면의 노이즈로 디졸브하며, 뉴스 보도로 시작된 금자와 카메라 사이의 고투를 마무리 짓는다.
영화는 ‘친절한 금자씨’가 교도소 내에서 ‘살아있는 천사’이자 ‘마녀’라 불렸다고 설명한다. 금자가 천사이자 마녀인 것처럼 카메라 또한 이중적 속성을 하고 있다. 악마가 이루어주는 소원은 원하는 형태로 다가오지 않는다고 이미 언급했다. 이금자는 소원대로 원모를 만나지만 시선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된 채 만난다. 입이 막힌 금자는 끝내 속죄하지 못하고, 구원을 얻지 못한다. 내레이션이 영화 밖의 전능하거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닌, 자신의 자식인 제니의 목소리였다는 것은, 금자가 영화의 금기를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종속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드러낸다.
악마와의 계약, 그리고 계약에서 시작된 속박은 영화를 만드는 자와 관객 모두에게 옮겨붙는다. 이는 박찬욱 영화 전반에서 드러나는 메타픽션적 속성 때문에 한층 더 강조된다. <박쥐>에서 상현은 엠마누엘 신부 기념 생화학 연구소에서 벌어지는 생체 실험에 자원하기 전, 카메라를 보며 말할 것을 요구받는다. 자신의 기도가 효험이 좋다면서 읊는 일명 ‘상현의 기도’가 이어지는 내내 상현은 신을 갈구하지만, 그의 기도를 지켜보는 것은 신이 아닌 카메라뿐이다. 내레이션처럼 깔리던 기도가 끝나고 상현은 피를 토한다. 이윽고 병상에서 이어지는 상현이 죽어가는 장면에서 영화는 누군가의 시점샷으로 이 장면을 보여준다. 처음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이 시점을 상현의 것이라 여길 것이다. 그런데 상현의 사망 선고 후에도 똑같은 시점샷이 이어지기 때문에, 시선의 주체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상현의 주변을 떠도는 투명한 유령 같은 존재가 상현이 죽는 장면을 시점샷으로 바라봤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이 존재는 금자가 불러낸 악마와 마찬가지로, 상현이 기도로 소환한 악마이다.
메피스토펠레스를 불러낸 파우스트 박사는 악마를 부려 쾌락을 추구했지만, 이는 자신의 영혼을 저당 잡혀 일시적으로 부리는 것에 불과했다. 소환자야말로 소환된 이에 종속된 하수인인 것이다. 박찬욱 영화 속 카메라는 마술사가 불러낸 악마와 같이, 일시적으로는 복종해 주인의 말을 듣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불러낸 자의 영혼을 침식해 자신의 하인으로 삼는다. 금자와 상현 역시 카메라 덕분에 소원처럼 복수를 이루고, 사람을 살릴 능력을 갖추게 되지만, 종내에는 카메라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박찬욱의 데뷔작인 <달은…해가 꾸는 꿈>으로 거슬러 가보면, 이 영화의 마지막 샷은 관객을 직시하는 배우이다. 영화 속 내레이션을 담당한 화자인 하영(송승환)이 스크린에 다가가자 영사가 중단되고, 하영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본다. <심판>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등장인물이 카메라를 직시하는 기법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영화관에 앉아서 불이 켜지기 전까지 피사체와 눈이 마주쳤던 관객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영화 내내 나의 시선을 끌던 자가 마지막에는 나를 쳐다본다는 것의 의미를. 박찬욱은 자신의 커리어 시작부터 최근작까지 내내 카메라의 시선에 천착해왔고, 시선을 끄는 것이 카메라의 권능인지, 아니면 피사체의 마력인지 되물었다. 어트랙션이란 특권인가, 속박인가?
세 번째 선언: 보는 것 – 거울을 지참하기
박찬욱이 여러 영화에 걸쳐 사용하는 작가적 인장 중 하나는 바로 360도로 회전하는 카메라다. 평론가 김영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전략) 남북한의 병사들이 비밀 공간에서 같이 어울릴 때 카메라의 원형 움직임을 통해 일시적으로 상상의 통합을 꾀하는 해방감을 준다.”(김영진, “영화세상의 분화구에서”, 『아가씨 아카입』, 218쪽)
그런데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처음 활용된 이 파노라마 촬영은 이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도 반복되고, <박쥐>에서는 반대로 뒤집힌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둥글게 모여 회의를 하는 정신병자들을 동그랗게 찍어 나가는데, 이 장면은 각자의 망상에 갇힌 이들이 서로 소통하는 듯하면서 절묘하게 빗겨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카메라의 원형 움직임은 상상의 통합이 아닌 상상의 단절을 보여주는 촬영으로 의미가 뒤집히고 있다. <박쥐>에서는 아예 ‘행복 한옥’ 앞 골목에 선 상현을 중심에 두고 카메라가 그 주변을 빙빙 돌며 대상을 압박하는 듯한 위협적인 원형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 상상의 통합이 단절되고, 아예 완전히 홀로 고립되는, 하나의 움직임이 아무렇지도 않게 정반대로 향하는 것이 박찬욱 영화의 특징이라는 것이 파노라마 촬영 장면을 쭉 나열해보면 나타난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의 명백한 의미를 지닌 기호라 여기는 것을 텅 빈 기표로 취급하는 난폭함은 박찬욱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박찬욱은 웃음과 울음 사이에 그어진 선이 얇디얇은 것이라는 사실을 필모그래피 전반에 걸쳐 강조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의 누나가 아파 내지르는 신음을 오르가즘을 가리키는 것이라 여기고 자위를 하는 옆방 남성에서 시작해, <올드보이>에서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을 보이는 오대수와 이우진, 역시나 기쁨과 절망을 하나의 표정과 숨소리를 통해 오고 가는 <친절한 금자씨> 속 이금자와 백선생 등등. <박쥐>에서도 심장에 손을 넣었다가 아무는 것을 알게 된 신부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가 하면, 라여사가 무언가 골똘히 응시하는 모습은 찡그린 것인지 우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얼굴이다. <아가씨>도 도입부에서 한 여성이 터뜨린 울음은 알고 보면 슬픔이 아닌 아쉬움의 표출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히데코가 병원에 갇히는 숙희를 보며 터뜨리는 웃음도 시간이 지나며 정반대 의미로 바뀐다. <헤어질 결심>의 가장 결정적인 대목 중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웃는 서래를 보고는 해준이 “마침내 운다”고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파노라마 촬영과 웃음이자 울음인 모호한 표정을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며 의미를 뒤집어나가는 게임을 벌이는 것은 결국 두 가지 작가적 인장을 하나의 의미로 고착시키지 못하게 만든다. 혹은, 고착되지 않는 유동성 자체가 박찬욱의 작가적 인장이 지닌 의미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가지 대표적인 작가적 인장이 지닌 의미를 믿지 말라는 작가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나의 기표가 가리키는 기의를, 혹은 반대로 하나의 기의가 가리키는 기표를 시시각각 전복시키며 박찬욱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엘라 휠러 윌콕스의 시 ‘고독’을 인용해 웃음과 울음이 가진 의미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하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본격적으로 웃기 시작하는 것이 감금방 안에서 거울을 박살 낸 이후라는 것을 떠올려보라. 여기서 오대수가 미쳤기 때문에 거울을 깼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오대수는 거울을 깼기 때문에 웃음과 울음의 경계를 잃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박찬욱 영화에서 악마적 힘을 지닌 카메라의 응시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부적인 거울을 깼기 때문에, 오대수는 카메라의 응시에 어찌할 도리 없이 노출되고 만다.
<스토커>에서 인디아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너 자신이 찍힌 사진을 본 적 있어? 거울로는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찍힌 사진. 그런 사진을 보면 ‘아, 저것도 나구나’ 하고 깨닫게 되지.” 이 대사를 통해 우리는 박찬욱 영화 속 거울이 카메라와 대립항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알다시피 거울은 거울에 비치는 사물의 앞뒤를 반전시켜 보여주는 물체다. 그 결과 우리 눈에 거울 속 사물은 좌우가 반전되어 비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박찬욱 영화에서 언뜻 보기에 거울은 주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자아도취와 그로 인한 파멸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올드보이>에서 이수아는 근친상간하며 손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박쥐>에서 태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사과를 갈다가 손가락을 다쳐 사과즙에 피를 흘리고, 이를 섭취한 라여사가 회복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죽고 만다. 거울을 본 메두사가 파멸을 맞이하듯이, 거울은 박찬욱 영화에서 주로 죽음을 뜻한다.
반대로 거울을 들고 있던 페르세우스가 승리했듯이, 거울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박쥐>에서 이블린은 구사일생한 후 거울을 보며 자기 목에 묻은 피를 닦아낸다. 이블린이 거울을 볼 때 그는 이수아나 태주와 달리 거울을 자아도취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블린은 거울을 순전히 피를 닦아내기 위한 실용적 도구로 취급한다. 이 직전 장면에서 박찬욱은 노골적으로 ‘응시’에 대한 이야기를 대사로 풀어내는데(“눈이 바라보는 대상이 있잖아요, 응시, 응? 누가 4초 이상 뭘 쳐다보면은 다른 사람이 반사적으로 그걸 보게 돼요. 거기 뭐가 있나 싶어서.” - 영두), 첫 번째 선언문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박찬욱 영화에서 응시는 사형 선고도 가능한 중죄다. 이 규칙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응시’하는 행위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이처럼 카메라와 거울이 시선의 주도권을 두고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것이 박찬욱 영화의 일관된 기조이다. 박찬욱은 거울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대표적 작가적 인장을 포함한 몇몇 눈에 띄는 영화 속 기호가 지닌 의미를 도무지 믿지 못하게 조정하고 있다.
문제는 박찬욱 영화의 기호가 지닌 이 유동성 앞에서 어떻게든 박찬욱 영화가 가진 의미를 단단히 고착시켜 해석해내려는 시도를 벌일 때 벌어지는 일이다. 그때 관객은 이수아나 태주와 같은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박찬욱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 앞에서 응시라는 유혹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관객이 스크린에 골몰하는 순간, 카메라의 마력은 관객을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스크린에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영화의 상영이 멈추고, 카메라에 포착되고 만다는 것이 박찬욱 데뷔작인 <달은…해가 꾸는 꿈>의 결말이었음을 유념하라.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하영의 샷이 마지막에 뜨는 걸 보며 하영을 동정한다면 관객은 이미 박찬욱이 파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영화의 서사에 따르면 하영은 카메라에 포착된 가련한 등장인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의 금기를 어기며 정면을 바라보는 이 도발적인 시선은, 이미지적으로는 스크린이 우리에게 쏘아 보내는 하나의 응시다.
그러니 관객은 박찬욱 영화를 보며 안심해서는 안 된다. 관객은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패배한다.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이 카메라를 통해 서래를 엿보다, 서래가 마침내 울었다고 확신한 순간, 도리어 서래가 웃음을 터뜨렸듯이. 그리고 해준이 서래 옆에 앉아 담뱃재를 받아주는 것이 그의 환상인 것처럼, “우는구나, 마침내”라는 대사 또한 그의 마음이 투영된 추측에 불과했듯이. 당신이 세상을 보는 창이라 생각한 그 스크린은 실은 우리의 마음이 투사(project)되고 있는 거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최종 선언 혹은 생존 수칙
첫 번째 선언, 박찬욱 영화 속 곤충 이미지는 죽음을 응시와 동일시하는 상징이다. 두 번째 선언, 박찬욱의 카메라는 계약을 이행하면 관객의 영혼을 속박하려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이다. 세 번째 선언, 박찬욱의 영화는 보는 이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박찬욱의 영화에 다가가 그것을 만지려는 순간, 거울을 지나치게 오래 응시한 죄로 인해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다.
박찬욱이 파둔 위와 같은 함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관객 스스로가 거울이 되는 길뿐이다. 우리는 박찬욱의 영화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대신, 박찬욱의 영화를 반사해야 한다. 서로 마주 보는 거울 속 이미지가 무한히 반복되는 드로스테 효과 끝에, 소실점처럼 남은 작은 이미지만이 당신이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실의 전부이다. 그러는 대신 가까이 다가가봤자, 우리에게 만져지는 것은 불 꺼진 스크린의 거칠거칠한 감촉이 아니면 차가운 거울 면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경고하건대, 거울 안 이미지를 응시하며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파우스트』)라고 외치지 말라. 파우스트 박사의 경우와는 달리, 이곳에 우릴 구원해줄 신은 없다.
이병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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