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골프는 영원한 '아날로그의 스포츠'

방민준 2023. 9. 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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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선수가 드라이버 샷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골프한국] 소문난 골프애호가였던 삼성그룹의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500개가 넘는 골프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드라이버가 많았는데 이는 골동품 가치가 있는 골프채 수집에 남다른 취미가 있기도 했지만 주위에서 잘 맞고 멀리 나간다며 신제품 드라이버를 선물했기 때문이다.



 



새 드라이버를 들고 온 사람마다 "이 채는 지금보다 10야드 더 나가는 신병기"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는데 이 회장은 "내가 30년도 넘게 골프를 쳤는데 그 신병기들의 효과가 사실이라면 난 벌써 파4홀 정도는 거뜬히 1온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드라이버를 신병기로 바꿀 때마다 거리가 10야드씩 더 나갔을 테니까 말이야. 다 소용없는 얘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아무리 골프 장비가 좋아지더라도 비거리를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볼을 멀리 정확하게 날리기 위한 좋은 스윙을 연마하지 않은 채 좋은 골프채로 이를 대신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일깨워준다.



 



'멀리, 그리고 정확하게(Far & Sure)'는 모든 골퍼의 영원한 화두(話頭)다. 골프의 길에 들어선 이상 결코 이 화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수백 년 동안 골퍼들이 매달렸지만 도달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다.



이 화두의 기원은 152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훨씬 전부터 이 화두는 골퍼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았겠지만 명문화한 것은 이때다.



 



제임스 6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찰스 2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내기 골프를 즐겼던 왕은 어느 날 잉글랜드의 귀족 2명과 골프의 발상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서로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골프의 발상지라고 주장, 논쟁은 끝날 줄 몰랐다.



참다못해 잉글랜드의 귀족이 왕에게 제안했다. "골프 내기로 결론을 매듭지으면 어떨까요."



 



이렇게 해서 잉글랜드의 귀족 2명 대 왕과 스코틀랜드인 1명이 골프 솜씨를 겨루게 되었다. 왕은 신하들을 시켜 스코틀랜드 최고의 골퍼를 찾게 했다. 왕의 파트너로 선발된 골퍼는 제화공인 존 패더슨으로, 신분은 천했지만 골프에는 뛰어났다. 그는 천한 신분을 이유로 극구 사양했으나 왕이 새삼 간청하는 바람에 골프장으로 나갔다.



시합은 쉽게 판가름 났다. 계속되는 패더슨의 묘기로 왕의 팀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내기에 걸린 거금 중 절반은 그에게 돌아갔다.



 



왕은 골프시합이 끝난 뒤 그에게 무엇인가 해줄 것이 없을까 궁리하다 상패 하나를 만들어주었다. 패더슨 가(家)의 문장(紋章)에 골프클럽 하나를 새긴 뒤 그 밑에 왕이 직접 'Far & Sure'라는 글귀를 써넣었다. 세 단어로 된 이 짧은 명구(名句)는 오늘날까지 모든 골퍼들의 영원한 화두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찰스 2세 역시 이 때문에 골프 역사에 영원히 빛나는 인물로 남게 되었다.



 



'Far & Sure'에 대한 골퍼들의 열망은 스윙의 개발과 함께 골프 장비의 발전을 촉발했다. 특히 장비의 발전은 눈부셨다. 스윙은 17세기에 이미 이론서가 쓰였을 정도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으나 골프채는 19세기에 접어들어서 히커리 나무로 만든 샤프트와 아이언 클럽이 등장하면서 현대적인 골프장비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클럽 한 개의 무게가 현재의 두 배 가까이 되는 600g이 넘었는데 히커리 샤프트의 개발로 100g 이상 줄일 수 있었다.



 



최근의 골프 장비 기술은 첨단과학과 접목되어 몇 개월마다 신제품이 나올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이병철 회장의 "다 쓸데없는 얘기야"라는 명언을 무색케 할 정도로 비거리 증대와 정확도 개선에 괄목할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미국 PGA 대회를 치르는 골프장들이 최근 너무 좋은 스코어가 나오자 난이도를 높이기 위해 코스 전장을 늘이는 것도 장비 개선 때문이다. 골프장비 산업은 가히 첨단산업이라 할 만큼 물리학 재료공학 항공우주공학 나노기술까지 동원되면서 아마추어 골퍼들에게도 '보다 멀리, 그리고 정확하게'를 실현할 수 있는 것 같은 환상을 갖게 한다.



 



사진=골프한국

 



 



골프볼의 딤플(표면에 보조개처럼 들어간 부분)도 400~500개가 이상적이라는 정설을 깨고 1,000여 개 넘게 만들어 공기저항을 줄이면서 방향성을 개선하는가 하면 나노기술을 응용하거나 칩을 내장하는 등 신개념 볼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드라이버와 아이언 클럽의 소재는 철이나 텅스텐, 또는 구리의 합금에서 티타늄과 카본이나 탄소강화섬유 등 비금속 소재를 사용하면서 놀라운 비거리를 실현해내고 있다. 샤프트도 스틸에서 그래파이트로, 다시 복합소재나 초경량 스틸로 골퍼들의 꿈을 담아내고 있다. 골프채의 구조 역시 달라져 이른바 다양한 우드에 하이브리드라는 다목적용 골프채까지 개발되어 짧은 비거리와 부정확성으로 고민하는 골퍼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필드에 나가지도 않고도 필드의 상황을 그대로 입체영상으로 재현해 즐길 수 있는 스크린골프도 대중화되었다.



 



획기적인 골프 장비의 발달은 아날로그적 스포츠인 골프를 디지털 스포츠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골프만큼 아날로그적인 요소와 디지털적인 요소가 혼합된 스포츠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첨단소재와 첨단과학이 골프에 응용되어 골프의 디지털화가 가속화 하더라도 골프 장비를 다루는 사람을 디지털화할 수 없다. 아무리 멀리 날아가는 볼, 쉽게 칠 수 있는 골프채가 나오더라도 스윙 동작은 기계가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윙의 주체가 사이보그가 아닌 사람인 이상 디지털적인 스윙 동작은 불가능하다.



 



골프에서 아날로그적인 요소의 제거가 불가능하다면 디지털적인 요소와 아날로그적인 요소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디지로그적 사고와 훈련이 불가피하다. 첨단소재와 첨단과학으로 만들어진 골프 장비도 잘 단련된 육체와 좋은 훈련으로 다듬어진 스윙, 그리고 골프 장비를 신체의 일부로 받아들여 일체화하려는 마음가짐과 만났을 때 비로소 제 기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다.



골프란 디지털화가 불가능한, 영원히 아날로그의 스포츠라는 점이 골프의 불가사의성의 핵심이 아닐까.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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