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장악’ 맞선 전례 없는 줄소송…‘해임 집행정지’ 법원 판단은

안영춘 2023. 9. 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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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언론장악]공영방송 독립의 새로운 ‘분수령’
유시춘 교육방송(EBS) 이사장, 권태선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남영진 전 한국방송(KBS) 이사장을 비롯한 공영방송 이사 등이 지난달 21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대통령의 공영방송 장악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지난달 31일 서울행정법원의 두 재판부가 1시간 간격으로 집행정지 사건의 첫 심문을 잇따라 열었다. 집행정지를 구하는 이는 문화방송(MBC) 관리·감독기구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의 권태선 전 이사장과 한국방송(KBS) 이사회의 남영진 전 이사장이었다. 이들은 각각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와 윤석열 대통령을 상대로 해임처분 취소소송도 냈다.

윤석열 정부 두해째, 방송 유관기관에서 해임된 이들의 소송이 줄을 잇고 있다. 두 공영방송 이사장에 앞서 지난 5월30일 윤 대통령이 면직한 한상혁 전 방통위원장은 면직 취소소송을 하고 있다. 지난달 17일 윤 대통령이 해촉한 정연주 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위원장과 이광복 전 부위원장도 해촉처분 취소소송과 집행정지 신청을 냈다. 두 사람의 집행정지 첫 심문은 오는 7일 열린다.

이르면 이달 안에 공영방송 사장 해임 관련 소송도 시작될 수 있다. 지난달 30일 이사회에 해임제청안이 상정된 김의철 한국방송 사장은 “향후 진행 상황에 따라” 법적 대응을 시사했다. 김기중 방문진 이사를 이달 중순 해임하는 절차를 밟고 있는 방통위는, 방문진의 여야 구도를 뒤집고 나면 곧바로 안형준 문화방송 사장 해임 절차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하나하나가 소송감이다.

전례 없는 ‘줄소송’은 전례 없는 ‘줄해임’과 동전의 양면이다. 윤 대통령이 지난 3월30일 국회에서 추천한 야권 성향 최민희 방통위원을 임명하지 않은 데 이어 한 전 방통위원장을 면직하면서 방통위 여야 구도가 2대 3에서 2대 1로 뒤집힌 뒤 불과 석달 만에 7명이 자리에서 떨려났고, 최소 3명이 비슷한 처지로 몰리고 있다. 눈여겨볼 대목은 더 있다. 원고 쪽에서 승소 가능성을 매우 크게 보고 있고, 본안 소송에 앞서 집행정지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008년 해임된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을 필두로 정부를 상대로 해임처분 취소소송을 낸 공영방송 사장과 이사(장)는 대부분 최종 승소했다. 이명박 정부 막판에 임명돼 박근혜 정부 때 해임된 길환영 한국방송 사장만 예외다. 개별 사건들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법부의 판단 취지는 한 지점으로 수렴된다. 언론학자이자 법학자인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공영방송 사장이나 이사의 지위와 임기는 방송 독립을 위해 다른 영역보다 강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가 도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짚었다.

사법부의 이런 취지는 문재인 정부 때 이뤄진 해임 사건들의 판결이 축적되면서 뚜렷해졌다. 이명박 정부에 의해 해임된 정연주 전 사장의 경우 법원의 조정을 받아들여 법인세를 낸 것을 ‘배임’으로 몰아간 것이 무죄가 나면서, 검찰의 기소를 빌미 삼은 해임도 이와 연동해 취소됐다. 이와 달리 문재인 정부에서 해임된 고대영 전 한국방송 사장의 경우, 법원은 8가지 해임사유 가운데 5가지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해임에 이를 만한 잘못까지는 아니라고 봤다. 고영주 전 방문진 이사장이나 강규형 전 한국방송 이사(현 교육방송 이사)의 해임 취소 판결 취지도 비슷했다. 특히, 고대영 전 사장에 대해서는 강규형 이사를 해임해 이사회 구성을 바꾼 것이 절차적으로 부당하다는 판단도 반영됐다.

윤석열 정부가 제시한 해임 사유를 액면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동안 사법부가 다져놓은 문턱의 높이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 더구나 해임 사태가 여당 추천 방통위원 두 사람의 폭주에서 비롯된 과정을 보면 절차적 정당성도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가 해임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본안 소송에서 해임이 취소되기 전에 ‘공영방송 장악’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송에 나선 이들은 이와 정반대의 거울상처럼 집행정지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공격을 받아 쓰러진 공영방송에 뒤늦게 방패를 쥐여주는 일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승선 교수는 “지금까지 법원은 이미 사장과 이사진이 바뀐 현상을 변경하는 판결을 하지 않아 정치권력이 공영방송의 독립을 무너뜨리는 문제가 반복될 수밖에 없게 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됐다”며 “상당한 법적 판단 기준이 사법부에 만들어져 있다면 집행정지 절차에도 인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집행정지가 받아들여질지도, 하나의 집행정지가 도미노로 이어질지도 전망하기는 쉽지 않다. 하승수 변호사는 “행정소송의 집행정지는 판사의 포괄적인 재량 영역이어서 이번 사건들의 특성을 범주화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서도 “개별 사실에 대한 판단보다 공영방송 독립과 나아가 민주주의가 집행정지와 깊이 닿아 있다는 것을 1심 재판부가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고 되물었다.

김성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미디어언론위원회 국장(변호사)은 “법원이 공영방송 독립의 형식에만 매달리면서 정작 공영방송 파괴 행위의 실상이 가려지는 역설이 발생하고 있다”며 “공영방송과 방송 유관기관의 독립이 법관 독립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인식이 집행정지 단계에 절실히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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