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지 않는 ‘5년 임기 대통령’, 바꿀 때 됐다
“5년 단임제가 장기집권을 막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제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건 부인할 수 없다. 또 수십 년의 군사독재 탓에 1987년 개헌 무렵엔 ‘대통령감’으로 꼽히는 정치인이 다수 존재했다. 단임제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다음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는 정치적 효과가 있다. 이런 장점이 날이 갈수록 옅어지는 게 현실이다. 정치적으로 단련되고 준비된 지도자는 점점 찾기가 힘들다.”
‘5년 단임 대통령제’와 내각제 논란 ②
디제이(DJ)와 와이에스(YS)는 대통령 중심제, 특히 미국식 4년 중임제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장석일 박사(현 성애병원 의료원장)는 “디제이는 정치제도에 관해선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 개헌(1969년)을 하기 전의 3공화국 헌법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 임기는 3공화국 헌법처럼 4년 중임제로 하는 게 맞다’고 말씀하시는 걸 여러 번 들었다”고 말했다. 국정운영의 연속성뿐 아니라 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게 4년 중임제를 지지한 이유였다. 지금과 같은 단임제에선 현직 대통령이 5년 집권에 대한 국민의 직접 평가에서 벗어나 있다. 이것이 오히려 국정운영의 책임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대통령제가 내각제보다 한국 현실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내각제를 하면 재벌이 국회의원을 관리하며 정치를 움직이게 될 것이라 우려했다. 김 대통령은 재임 시절 윤여준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윤 수석, 이거 하나는 꼭 명심하세요. 우리나라에서 내각제 하면 큰일 납니다. 가령 국회의원이 300명이라고 치면, 그중 ㄱ 그룹이 가장 많은 국회의원을 움직일 거고, ㄴ·ㄷ 그룹도 수십명의 의원들을 관리할 겁니다. 그러면 정말 재벌 공화국 되는 겁니다.”
디제이와 와이에스가 내각제에 소극적인 이유는 우리 국민이 내각제를 멀리한 이유와 맥을 같이 했다. 하지만 ‘5년 단임 대통령제’의 문제는 계속 제기됐다. 막상 집권에 성공하면 ‘5년 단임’이란 조건이 국정 운영에 작지 않은 질곡으로 작용한다는 걸 모든 대통령은 깨달았다.
윤여준 전 수석은 “5년 단임제에서 실제로 대통령이 일할 수 있는 기간은 3년 정도다. 그것도 첫해에 핵심 어젠다를 국민에게 분명하게 제시하고 일을 추진해야만 임기 내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래서 5년 단임제에선 임기 첫해가 매우 중요하다. 임기 첫해를 그냥 흘려보내면 남은 4년은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부속실장을 지낸 김한정 국회의원은 “디제이는 너무 늦게 (74살에) 대통령이 된 걸 아쉬워했다. 만약 디제이가 60대에 대통령이 됐다면, 또 4년 중임제였다면, 한 번 더 임기를 하면서 못다 이룬 남북 화해와 한반도 평화를 뿌리내리고 싶어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도 5년이란 짧은 임기 탓에 급하게 추진된 측면이 있다. 이명박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을 지낸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4대강 사업은 수자원 확보와 조절이라는 측면에서 꼭 필요했다고 본다. 그러나 워낙 반대가 심하니까 내부에서도 여론을 유리한 방향을 이끌면서 속도 조절을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정권이 바뀌면 사업이 흐지부지될 걸 우려했다. 사업의 속도를 올린 데엔 5년이란 임기를 의식했던 측면이 작용했다”고 말했다.
5년 단임 대통령제는 ‘비동시 선거주기’와 맞물리면서 정치적 불안정성을 키우는 측면도 있다. 전국 동시 지방선거를 도입한 1995년 이후, 대선이나 총선, 지방선거가 없었던 해는 열한 해에 그친다. (1999년, 2001년, 2003년, 2005년, 2009년, 2011년, 2013년, 2015년, 2019년, 2021년, 2023년) 이중 최소한 2곳 이상의 광역단체장 또는 5곳 이상의 국회의원·기초단체장 재보궐선거가 치러진 해가 여덟 해다. (1999년, 2001년, 2003년, 2005년, 2009년, 2011년, 2013년, 2021년)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현직 대통령은 정치적 중간평가 성격의 선거를 치르는 셈이다.
선거 과잉은 대통령이 장기적 국정운영보다 단기적인 정치적 싸움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저출산 고령화나 연금 개혁 같은 핵심 과제를 회피하고, 지지층 결집에 유리한 포퓰리즘 이슈에 몰두하게 한다. 윤석열 정부는 2022년 3월9일 대선일 이후, 3개월 남짓 남은 지방선거 승리에 온 힘을 기울였다. 지금은 2024년 4월 총선 승리에 모든 국정 에너지를 쏟고 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학)는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직후 5년 단임 대통령제를 채택한 건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보면 한국뿐 아니라 제3의 민주화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많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 단임제가 유행했다. 필리핀·멕시코·브라질이 그런 경우다. 한국에서도 5년 단임제가 장기집권을 막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제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건 부인할 수 없다. 수십 년의 군사독재 탓에 1987년 개헌 무렵엔 ‘대통령감’으로 꼽히는 정치인이 다수 존재했다. 단임제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다음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는 정치적 효과가 있다. 이런 장점이 날이 갈수록 옅어지는 게 현실이다. 정치적으로 단련되고 준비된 지도자는 점점 찾기가 힘들다. 이젠 단임제와 비동시선거가 정치 불안정성 및 갈등을 오히려 증폭하는 작용을 한다.”
이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4년 중임제 개헌을 제안했던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2007년 1월9일 노 대통령은 4년 중임제 원포인트 개헌을 담은 대국민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2007년은 대선이 있는 해였다. 여야의 주요 대선 주자들은 개헌에 반대했다. 대선을 앞두고 개헌 이슈가 모든 걸 빨아들이면서 정치 지형을 바꾸는 걸 원하지 않았다. 결국 노 대통령은 개헌안 발의를 포기했다.
노 대통령은 4년 중임제와 함께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를 맞추자’고 제안했다. 4년 대통령 임기 도중에 총선을 중간선거 형식으로 치르는 미국식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대선 몇 개월 뒤에 총선을 치르고, 지방선거를 임기 중간에 치르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같은 해에 대선과 총선, 2년 뒤 지방선거’라는 선거 주기가 만들어진다. 당시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인사는 “노 대통령은 우리 헌법의 내각제 요소를 최대한 활용하려 했다. 권력의 절반을 내주더라도 국회 다수당에 총리 지명권을 주고 싶다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 논란을 부른 ‘대연정’ 발언은 그런 차원에서 나왔다. 그런데 야당이 총리를 맡으면 대통령과 총리가 대립하면서 오히려 국정이 불안정해질 거라는 비판이 많았다. 그래서 대선과 총선을 같은 해에 치르자, 그러면 대선에서 이긴 집권당이 다수당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그렇게 국정운영의 안정성을 높이자는 뜻이었다. 만약 야당이 다수당이 된다면, 야당 대표가 총리를 맡는 게 국민의 뜻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디제이는 생의 마지막에 생각을 바꿨다. ‘5년 단임 대통령제’를 강하게 비판하며,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나 내각책임제도 괜찮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검찰 수사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게 영향을 줬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거 이듬해인 2010년 출간된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나는 오랫동안 대통령 중심제를 지지했고, 목숨을 걸고 싸웠다. 진정 내가 원했던 것은 정·부통령제였다. 지금도 정·부통령제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대통령제하에서 10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이 비극적 종말을 맞았지만 그 후로도 독재자나 그 아류들이 출현했다. 이를 막기 위해 이제는 대통령 중심제를 바꾸는 것도 고려해 봄 직하다. 5년 단임제는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다. 이제 민의를 따르지 않는 독재자는 민의로 퇴출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책임제를 도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개헌의 필요성엔 여야 모두 공감하지만, 행동엔 소극적이다. 지지층의 반대 때문이다. 국민의힘 지지층은 ‘지금 윤석열 대통령이 열심히 하고 있는데 개헌을 얘기하는 건 국정 동력을 떨어뜨리려는 의도’라고 말한다. 반대로 민주당 지지층에선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가 0.73%포인트 차로 아깝게 졌다. 다음 대선에선 반드시 정권을 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이 지지하지 않는 내각제를 정치권이 추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4년 중임제 + 분권형 대통령제’는 컨센서스를 이룰 수 있다.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고, 국회에 총리 지명권을 주며, 대선과 총선을 같은 해에 치러 집권당이 다수당이 될 확률을 높이는 방향은 여야 어느 쪽에도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다. 완벽한 제도는 없다. 현실의 문제를 개선하면서 제도의 취지를 살려나가는 게 최선이다. 제도 개혁이 극단적 대립과 정치 보복이라는 한국정치의 고질을 치료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완화하는 효과적인 첫걸음은 될 수 있다.
박찬수ㅣ대기자
한겨레신문사에서 워싱턴특파원과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와 국회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 한국 진보운동의 과제를 담은 <진보를 찾습니다>(2021년)를 펴냈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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